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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동기화'는 힙합, 알앤비 음악과 관련한 추억, 혹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소소한 에세이입니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5년간 여자 사람과 말이라는 것을 거의 섞지 못하고 살았다. 불행하게도 고3 시절부터는 악마와도 같던 PC 통신을 만나며 온라인상에서만 여자 사람과 대화라는 것을 해보았고 학창시절 마지막 1년을 컴퓨터와 연애하며 지낸 탓에 수능은 조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와 대화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던 중학교 1학년 시절 어느 한 여자 사람은 나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어 준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포근해진다.사건은 이랬다. 중학교 1학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필자는 고래사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업의 열의가 컸던 탓… 은 아니고 어머님의 성화에 못 이겨 수술 하루 만에 학원을 나가게 되었고, 사각 트렁크 팬티 속에 종이컵이라는 이름의 보호대를 차고서는 현진영도 아닌데 엉거주춤을 추는 추태를 보였다. 주위 학생들은 나만 모르는 비밀을 아는 듯 쑥덕쑥덕 낄낄거렸고 내가 무척이나 무안해 하던 와중에 그 하얀 피부의 여학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었다.
'괜찮아 경화야, 우리 오빠도 어제 수술 했어.'아... 따듯하지 않은가? 이렇듯 각박한 세상을 살다 보면 말 한마디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힙합 팬이 현직 래퍼들에게 이러한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받는다면 그 기억 역시 향기가 되어 가슴속에 오랜 시간 머무를 것이다. 정우성도 광고 속에서 임수정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하지 않는가 '향기는 남아 있잖아.'라고…. 어쨌든 이렇게 향기로운 옛 기억을 핑계 삼아 필자가 살면서 래퍼들에게 들었던 가슴 따듯했던 말 5선을 소개해 볼까 한다.
1. '비스킷 하나 드실래요?'
국내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성지와도 같던 마스터플랜에 공연이 있는 날이면, 클럽에 입장하기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서있었고 당일 공연 라인업인 래퍼들은 대기실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던가, 나 같은 구경꾼들과 대화를 나누던가, 바로 앞 식당에서 제육덮밥을 먹곤 했다. 마플 앞 식당의 제육덮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몰라도 MC 성천 같은 사람은 공연 중 항상 '제육덮밥 맛있어요.'라는 멘트를 날리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꽤 앞자리에 줄을 서 있었고 어느 한 래퍼는 나에게 다가와 에이스 크래커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비스킷 하나 드실래요?'
나에게 이 말을 건넨 사람은 가리온의 MC 메타였는데, 나의 대답은 '아니요' 였다. 당시 무안했을지도 모를 MC 메타 씨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유도 같이 주셨으면 받아먹었겠지만, 클럽 공연 전에 목 막히고 싶진 않았기에….
2. '경화 수고했어.'
역시나 마스터플랜 공연장. UMC를 비롯한 소울트레인 크루가 공연을 하던 날 1부가 끝나고 휴식시간을 맞아 당시 보통의 힙합 공연이 그러했듯 DJ는 비트를 틀었고 구경꾼들이 올라가 프리스타일을 하곤 했었다. 앞선 두 명이 프리스타일을 끝내자 당시 PC 통신의 랩 소모임에 있던 내 이름이 불렸고, 프리스타일 끝판왕이 된 마음으로 얼떨결에 올라가서 랩을 했다. 지금이야 술제이, JJK, 허클베리 피, 지조 같은 훌륭한 프리스타일 래퍼가 많지만, 이 이야기는 10년 전 이야기다. 내가 랩을 하자 관객들은 박수를 쳐주었고 UMC는 내게서 마이크를 받아가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경화 수고했어.'
평소 시니컬해 보였던 UMC가 '수고했어'라니. 차가운 도시 남자에게 따듯한 말을 들었다는 생각에 그날 공연은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진: MC 메타(좌), 보니(우)3. '너 나중에 나랑 같이 랩하자'
PC통신 시절 돈이 없을 때는 신촌 연대 잔디밭에 앉아 모임을 하곤 했다. 그날 모임에는 조성진이라는 잘생긴 청년이 있었는데 외모가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조성모와 흡사하다는 느낌에 나는 "형 혹시 조매실 동생 아닌가요?"라는 개드립을 날렸고, 그 청년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청년은 당시 스나이퍼와 함께 랩을 했고 지금은 '스컬' 이라는 이름의 래퍼가 되었다. 이날 그는 스나이퍼를 벗어나 솔로 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 친구와 함께 해보고 싶다며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너 나중에 나랑 같이 랩 하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컬은 스나이퍼를 거쳐 대거즈(Daggerz)가 되었고 이후, 이낙(E.Knock)이 된 소래눈보이와 듀오를 결성했으며, 오늘날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사진을 찍고 빌보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스컬의 성공을 보며 이전에 했던 구두계약의 효력이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4. '아 형 잘 바꾸었네요 이게 더 좋은 거 같아요'
2002년 PC 통신 모임이 있던 클럽. 일진스(Ill Jeanz)와 써드코스트(3rd Coast) 출신의 래퍼 지호는 30여 명이 참여한 O.X 퀴즈를 주선하였고 상품으로는 신보 CD와 클럽 바로 앞 레코드샵에서 원하는 CD로 교환할 수 있는 특혜를 내걸었다. 이에 필자는 70퍼센트의 배경지식과 30퍼센트의 영감으로 최후의 3인까지 살아남았고 결국, 마지막 문제를 혼자 맞추면서 그날의 우승자가 되었다. 살면서 어디에서 1등 한 기억이 많지 않아 매우 기뻤는데, 상품으로 받은 신보 CD는 다름 아닌 기계인간의 모습이 생뚱하기 그지없는 엑지빗(Xzibit)의 앨범이었고, 이에 필자는 바로 앞 레코드샵으로 달려가 쿨하게 엑지밋을 던져 버리곤 가부좌의 얌전한 커버가 돋보이는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의 신보로 교환하였다. 주선자에게 알려야 마땅함을 느껴 나는 지호에게 음반을 교환한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이에 지호는 '아 형 잘 바꾸었네요. 이게 더 좋은 거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당시 느낌은 마치 장학퀴즈의 우승자가 MC에게 칭찬받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난 그날의 퀴즈왕이었고….
참고로 그날의 마지막 문제는 ‘엘엘쿨제이(LL Cool J)의 [10]이 그의 몇 번째 앨범인가?’라는 질문이었다.
5. '생일 축하드려요!', '네, 예리하시네요 역시 경화님', '우와 결혼 축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팬해주세요'
마지막은 트랩카드다. 래퍼는 아니지만, 이 모든 대화는 한국의 디바 보니(Boni aka 신보경)양이 내게 해준 말이다. 그녀가 015B 시절 부른 "잠시 길을 잃다"를 듣고 난 그녀의 팬이 되었고 2008년 그녀와 미니홈피 1촌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팬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나의 생일 때, 그녀의 음반을 듣고 감상문을 남긴 나에게, 나의 결혼에, 나의 팬질에 이처럼 따듯한 말들을 해주었다. 부럽지 아니한가? 당신은 진 거다. 하지만, 이 모든 대화가 온라인 대화인 건 안자랑.
공연장을 쫓아 다니든, 트위터를 통해서든, 개인적인 친분에서든 래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 기억해두자.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추억하고 싶을 때마다 가슴 한편에서 떠오를 짙은 향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끝으로 나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었던 뮤지션들과 중학생 시절 그 여학생에게 감사를….
여러분이 뮤지션으로부터 들었던 따듯했던 한마디는 무엇이었나요?
그 추억을 댓글, 혹은 리드머 트위터(@inplanet)를 통해 공유해주세요~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이경화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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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나이라고 하니깐 힙합식 인사가 기억이 나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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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짜 재밌게 쓰시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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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야 우리오빠도 어제 했어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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