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
뮤지션 윤종신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이 작사가가 돼보려고 글을 보내주지만, 글과 음악의 노랫말을 쓰는 작업은 전혀 다른 영역임을 알리기도 했다. 실제로 작사가는 멜로디에 어울리는 노랫말을 입히는 과정에서 음절 하나로 며칠을 고민하기도 한다. 물론, 요즘처럼 멜로디보단 리듬 위주의 음악과 후크송이 판치는 세상에 이런 고민으로 고생하는 작사가는 조금 줄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흔히 랩을 ‘거리의 詩’라고 한다. 음악적 특성인 라임으로 잘 쓰인 랩 가사는 비트 없이 읽기만 해도 운율 감이 형성되기도 한다. 많은 시인이 랩퍼가 될 수는 없지만, 많은 랩퍼들의 가사를 詩로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실제로 투팍(2pac)은 [The Rose That Grew From Concnete(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같은 시집을 내기도 하지 않았나? 또한, 소설가 은희경은 키비의 곡에서 자신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모티프를 따오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것과 작사의 영역은 전혀 다르다고 윤종신의 의견을 서두에 깔아두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윤종신이 우려했던 대로 망작이 됐던 사례와 그의 의견에 반했던 문학가와 음악이 만나 시너지를 냈던 몇몇 사례를 알아보자.
최근 소설 [은교]의 영화화와 TV 출연으로 다시금 화제를 일으켰던 소설가 박범신은 비 뮤지션으로 몇 곡의 작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국내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故 이남이는 자신의 솔로 앨범에서 중광스님과 박범신 같은 비 뮤지션의 글을 노랫말로 썼다.
이남이 “그대가 떠난다면”그대는 눈빛 하나로도 내 온가슴 불지피고
그대는 손끝 하나로도 내 온핏줄 잠재운다
그대는 한마디 말로도 내 온세월 다스리고
그대는 한소절 노래로도 내 온마음 잠재운다
그대가 떠난다면 떠나고 만다면
아무것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
박범신이 쓴 단 여섯 줄의 노랫말은 이남이의 목소리와 결합하며 애절한 감정을 전달한다.
“그대는”으로 시작하는 두운법과 동일한 글자수에서는 음수율의 형식이 떠오른다. 딱히 노랫말이 아닌 하나의 詩로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청자의 감정선을 뒤흔드는 노랫말만 본다면, 여느 기성 작사가보다 더욱 뛰어난 노랫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범신은 이 곡 외에도 사랑과 평화의 앨범에서 자신의 소설과 역시 영화로 만들어진 동명의 곡 “불의 나라”에서도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박범신(좌), 고 이남이(우)문학가 출신인 박범신이 단 몇 곡으로 음악가와 만났다면, 젊은 시인 원태연은 매우 많은 작업물을 남겼다. 원태연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그걸 뺀만큼 널 사랑해’ 같은 유명한 구절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뜻이 압축되어 있는 어려운 詩가 아닌 남녀 간의 연애에 관해 공감을 일으키는 글로 대표되는 원태연은 비록, 유치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감수성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많은 팬층을 유지해왔고, 그 감수성을 노랫말로 옮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본인 역시 연애 경험이 전무하던 중, 고교 시절 그의 시를 읽으며 알 수 없는 아련함에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싸이월드 감수성 돋는 글들은 원태연과 귀여니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댄스, 발라드 심지어 랩 가사까지 써내려 간 원태연의 대표곡 몇 곡을 알아보자.
김현철 “왜 그래” 中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너의 얼굴이 말이 아냐
말해봐 왜 그래? 나쁜 일 인거야? 나랑 눈도 맞추질 못해 지금 넌
도대체 왜 아무런 말도 없는거야?
95년 김현철의 4집 수록 트랙으로 황세준, 김현철이 작곡하고 원태연과 김현철이 공동 작사로 이름을 올린 트랙이다. 구어체로만 이루어진 가사와 적재적소에 터지는 브라스 섹션이 매우 돋보이는 곡이다. 원태연은 이 곡을 비롯하여 타이틀 곡 “나를”에서도 작사에 이름을 올리며 김현철의 성공을 도왔다.원태연이 작사한 곡 중 힙합, 알앤비 팬들이 알만한 가장 유명한 트랙은 따로 있다. 최근 케이블 TV [음악의 신]에서 언급되기도 한 샵(S#arp)의 “내 입술..,따듯한 커피처럼”이다. 이지혜가 메인 보컬을 맡고 나머지 멤버들이 랩을 맡은 이 곡은 박근태가 작곡하고 원태연이 노랫말을 붙였다.
샵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울지마 이미 지난 일이야
삶의 반칙선 위에 점일 뿐이야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야
어른이 되는 단지 과정일 뿐 야
Yo. 단지 과정일 뿐 야
싱어의 가사가 아닌 랩 가사를 쓰기 시작한 원태연과 기존의 댄스음악에서 벗어나 대중과 마니아를 아우를만한 따뜻한 감성을 지녔던 트랙은 겨울이라는 계절적인 요소와 맞물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곡이 발매될 당시 첫사랑에 실패한 필자는 문과생 출신임에도 삶의 반칙선 위 점이라는 구절을 들을 때면 수학 좌표가 떠오르며 가슴 아파해야 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어른이 되는 과정일 뿐이야’라는 구절은 故 김광석 못지않게 삶의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아 내 첫사랑….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곡을 시작으로 원태연은 인기 작사가로 자리매김하며 시인보다는 작사가로 활동을 펼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렇듯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원태연이지만, 실패한 곡들도 많았다. 특히, 그의 곡 중 가장 망작으로 평가되는 곡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솔리드 “끼리끼리” 中넌 혹시 알고 있는 난 너무 멋지단 걸
미스터 코리아도 멋진 배우들도
내 지금 모습처럼 폼 나진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니들은 날 끼워 주질 않니
솔리드는 혜성같이 등장하여 급속도로 몰락한 그룹이다. 굵직한 톤이 매력적이던 랩퍼 이준과 뛰어난 알앤비 보컬 김조한, 준수한 프로듀싱의 정재윤으로 이루어진 솔리드는 데뷔 앨범 때는 별다른 홍보도 없이 묻혔지만, 그 유명한 “이 밤의 끝을 잡고”와 “나만의 친구”가 수록된 2집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발매된 3집 역시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해피엔딩”, “천생연분”, “이제 그만 화풀어요” 등이 사랑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흑인음악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1집의 실패를 보상이라도 받았던 걸까? 2,3집에서 엄청난 히트를 한 그들은 어떤 곡을 내더라도 4집에서 성공은 쉽사리 이루어지리라 예상했고, 그들은 원태연이 작사한 “끼리끼리”를 타이틀곡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탄탄한 팬층을 유지했던 솔리드의 세계가 무너진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우스운지는 알지만, 만약 솔리드가 원태연이 작사한 이 곡을 취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생각보다 더욱 오래 롱런할 가능성이 있었다.재미도 감동도 없었던 “끼리끼리”는 흥행 참패했고, 결국, 솔리드는 이 앨범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정규앨범 발매 없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공일오비(015B)의 곡에 버벌진트가 참여한 “그녀에게 전화오게 하는 방법”에서 솔리드 4집 중 원태연이 작사한 “끝이 아니기를”이 하이 피치 샘플링되며 다시금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솔리드가 힙합과 댄스의 경계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욕구도 채워주지 못한 “끼리끼리”보다 “끝이 아니기를”을 메인 타이틀 곡으로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원태연의 이러한 실패는 이전에 언급한 “내 입술…따뜻한 커피처럼”의 성공에 큰 기반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다.
이처럼 원태연은 망작과 히트작 사이를 오가며 여전히 작사가로 활동 중이다. 최근엔 시인, 소설가, 작사가뿐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도 진출하며 여러 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있다. 댄스그룹 LPG의 곡 “장동건 이효리”라는 곡에서는 유명스타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꼈는지 임제나라는 필명으로 작사하기도 했지만, 이내 원작사가가 원태연임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처럼 꼭 문학가가 작사가로 활동하는 일 외에도 기존에 존재하던 시를 노랫말로 옮기는 작업 역시 익숙하다.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용의 “향수”를 이동원은 노랫말로 작업하였고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날”에는 송창식이 곡을 붙였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일부분을 마야는 자신의 데뷔곡으로 인용하였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으로 익숙한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에 안치환은 멜로디를 붙여 글로만 읽을 때는 다 느낄 수 없었던 커다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소금인형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알기 위해
나는 나는당신의 핏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윤종신이 말한 것처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작사가가 될 순 없다. 하지만 몇몇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글쟁이와 훌륭한 멜로디가 만나면 그 어떤 곡보다 커다란 감동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덕규와 함춘호로 이루어진 그룹 시인과 촌장이 소설가 서영은의 소설 [시인과 촌장]에서 그룹명을 따왔듯이 문학과 음악은 때로는 무척 가까이에서 서로 영감과 영향을 준다.나는 랩 가사에서 종종 소설이나 시에서 느낄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을 받는다. 모든 글쟁이가 뮤지션이 될 수는 없지만, 보통 자신의 가사는 스스로 도맡아 쓰는 랩퍼의 경우 각자가 한 명의 문학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좋고 나쁨의 선택은 리스너의 몫이지만, 국내에서도 투팍이 살아생전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듯 큰 감동을 일으킬만한 랩 가사가 많이 나온다면 좋겠다. 단순하고 쉽게 써내려 간 가사가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고민의 흔적이 필요한 영역이 작사임은 분명하기에….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이경화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
추천 0 | 비추 0
추천 2 | 비추 1
국내 힙합의 경우 2009-2010년 즈음부터 랩 스킬에 대한 집중, Swagger 위주의 가사 등의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점점 가사 자체의 수준은 낮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MC들 스스로가 거리위의 시인이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아쉽기도 합니다.
추천 0 | 비추 0
추천 0 | 비추 0
힙합 곡은 아니지만
원래 가사와 청취하면서 다르게 들리는 가사중 갑은
이문세+고은희의 이별이야기 속 가사가 아닐까 싶어요
원래 가사는
"그대 내게 말로는 못하고 탁자 위에 눌러 쓰신"
인데
많은 청자들이 "물로 쓰신" 으로 알아 듣더라 하는 일화가 생각나네요.
심지어 물로 쓰신이라는 가사가 더 애틋하기도 해서
이문세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며..
훗날 라디오에서 그 가사는 "눌러 쓰신" 이 맞다고 얘기했다죠 ^^
추천 0 | 비추 0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깜빡하고 놓쳤었네요.
심지어 말씀하신 도서중에 재미있게 읽은 책도 있었는데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올바른 피드백 지적 감사 드립니다 ('')(..)
말씀하신 샵의 가사 부분은 반칙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추천 0 | 비추 0
근데 항상 궁금했던건데 반칙선 인가요..? 반직선 인가요?
네이버뮤직 가사 기준으로 봤을땐 샾 앨범껀 검색하면 반칙선으로 나오는데
이지혜 1집으로 검색하면 반직선 으로 나오더라구요
아 그리고 기사 중에 '국내에선 아직 랩이나 힙합 음악을 하는 사람이 시집이나 문학 활동을 한 경우는 없지만' 이란 부분이 잘못된 거 같습니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손아람씨는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었고...
Qwer 님이 언급하신 타블로도 '당신의 조각들'도 냈었고..
추천 1 | 비추 1
추천 0 | 비추 0
추천 2 | 비추 0
당신의 조각들도 나름 괜찮게 읽었고. 소년을 위로해줘는 노래에 비해 많이 아쉬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