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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Winehouse 추모특집 ‘대체 불가능의 팝 아이콘, 그녀에 대한 모든 것’
민혜경 작성 | 2012-07-23 17:01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56 | 스크랩스크랩 | 137,437 View



2011년 7월 16일,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가 세르비아에서 유럽 투어의 첫 공연을 시작하였다. 한동안 모습을 감춘 후 열린 공연이라 세르비아 물가에 비해 비싼 티켓 값에도 수많은 관객이 몰렸다. 장당 약 6만 원이었던 티켓 값은 평범한 세르비아 사람의 일주일 치 임금과 비슷했다. 그만큼 엄청난 기대 속에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무대에 오른 에이미의 모습은 온전치 못하였다. 술잔을 들고 무대에 오른 에이미는 가사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제멋대로 노래를 부르다가 백업 보컬인 아디(Ade) 옆에 멍한 모습으로 서 있곤 했다. 관객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온갖 야유를 퍼부었고, 다음 날 유럽의 수많은 매체는 에이미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기사로 채워졌다. 이에 에이미 측에서는 부랴부랴 다음 공연을 취소하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 굴욕적인 공연이 에이미의 생전 최후의 무대가 될 것이었음을.......

-음악이 먼저였던 유년 시절, 래퍼를 꿈 꾸던 소녀-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1983년, 유대인이 모여 사는 런던 북부 사우스게이트(Southgate)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재니스 와인하우스(Janis Winehouse)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순탄치만은 않은 과정을 겪었다. 재니스가 에이미를 임신할 무렵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 MS)이 발병한 것. 그래서 재니스는 에이미의 유년시절, 엄마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이러한 모성의 부재가 반드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에이미는 다소 유별난 성격의 소녀였다. 실수로 셀로판을 삼켜 호흡 곤란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후, 쇼핑몰에서 일부러 사라지는 등, 주변 어른들의 걱정을 살만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벌였다. 아버지 밋치 와인하우스(Mitch Winehouse)의 인터뷰에 의하면, 어린 에이미는 이러한 어른들의 걱정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재니스는 딸 에이미를 ‘호기심 많고 밝은 아이이나 매우 부끄러움이 많기도 한,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와인하우스 집안은 유대인 가정임에도 종교보다는 음악이 가족의 중심이었다. 에이미의 삼촌 두 명은 프로페셔널 뮤지션이었으며, 아버지 밋치는 재즈 음악을 사랑했고 항상 노래를 흥얼거렸다. 훗날, 에이미가 최고의 뮤지션이 된 이후, 에이미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덕분에 에이미도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수업 도중에도 쉴 새 없이 노래 부르는 에이미를 반기지 않았다. 가수로서 성공 후, 그의 이미지 탓에 에이미가 정규 교육 과정에 거부감을 가진 반항아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사실 에이미는 학교, 그리고 배움 자체를 좋아하였다. 어머니 재니스는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뒤늦게 약학 관련 학위를 따는 등, 에이미의 집은 늘 학구적이었다. 재니스는 학위 취득 이후 커리어를 인정받으며 수입이 늘어나, 두 칸짜리 집에서 빅토리아풍 테라스가 딸린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모의 노력으로 에이미는 안정되고 화목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그녀는 성인이 된 후 ‘Daddy’s Girl’이라는 문신을 새길 정도로 아버지 밋치를 잘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시 외판원이었던 밋치는 일의 특성상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이 무렵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재니스와 밋치는 에이미가 9세 때 이혼하게 된다.



부모의 이혼 후, 에이미는 할머니 신시아(Cynthia)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신시아 역시 예술적 안목을 지녔는데, 젊은 시절에는 40년대 재즈 뮤지션 로니 스콧(Ronnie Scott)과 교제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신시아는 학교에서 연극을 하는 에이미를 보며 그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런던의 예술 학교 수지 언쇼 시어터 스쿨(Susi Earnshaw Theatre School)에 갈 것을 권유하였다. 이곳에서 에이미는 생전 베스트 프렌드이자 음악적 동료인 줄리엣 애쉬비(Juliette Ashby)를 만나게 된다.

열 살 동갑내기 두 소녀들의 공통 관심사는 바로 힙합이었다. 둘은 모두 솔트-엔-페파(Salt-N-Pepa)의 광팬이었고, 이들을 따라 랩 그룹 스윗 '엔’ 사워(Sweet ’N’ Sour)를 결성하게 된다. “Spinderella”라는 자작곡까지 만들게 되는데, 이로 인해 에이미는 가수를 진지하게 꿈꾸게 된다.

이후, 에이미는 런던 소재 유명 예술 학교인 실비아 영 시어터 스쿨(Sylvia Young Theatre School)에 진학하였다. 실비아 스쿨은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의 엠마 번튼(Emma Bunton), 니콜라스 홀트(Nicholas Hoult), 빌리 파이퍼(Billie Piper), 리타 오라(Rita Ora) 등 수많은 배우와 가수를 배출한 학교이다. 그러므로 가수가 되고 싶었고 학교가 좋았던 에이미에게는 꿈과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사춘기 반항심에 코를 뚫고 등교하며 좋지 않은 성적까지 받아 곧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시간이 지나, 실비아 스쿨의 한 교사는 에이미가 방출된 이유가 코를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짧은 재학 기간만으로 에이미의 이름은 전교생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바로 좋지 못한 행실과 가수로서 엄청난 재능이었다.

밴드 맥플라이(McFly)의 멤버 톰 플레쳐(Tom Fletcher)는 한 인터뷰에서 에이미와 나이가 달라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음에도, 에이미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비록, 에이미가 학교의 문제아였으나 학교에서 방출당했다는 사실에 매우 괴로워했다. 스윗 '엔' 사워 활동을 위해 기타를 처음 배운 후, 에이미는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기타를 배우며, 훗날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지켜보는 무대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꿈은 토니 베넷과 “Body And Soul”을 함께 작업하며 이뤄지게 된다.

-뜻 하지 않던 레코드 딜,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15세 무렵, 소울 싱어 타일러 제임스(Tyler James)와 데이트를 시작한 에이미. 타일러는 에이미의 데모 테잎을 여러 레이블 A&R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스타로서 성공보다는 노래할 수 있다는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힙합과 재즈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물을 만들었다. 동네 펍(Pub)에서 공연을 하며 가수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고, 함께 공연했던 볼샤 밴드(Bolsha Band)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였다. 1집부터 공연은 물론 음반 녹음 작업부터 코러스로 참여한 아디의 만남도 이때 이뤄졌다. 에이미는 청소년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코러스로도 활동했는데, 담당 교사의 추천으로 에이미의 데모테잎은 아메리칸 아이돌의 제작자이자, 마돈나(Madonna), 스파이스 걸스 등 최고의 팝스타를 발굴한 전설적 프로듀서 사이먼 퓰러(Simon Fuller)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에이미의 목소리를 들은 사이먼은 즉시 그녀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에이미의 가능성을 단박에 알아본 사이먼은 살람 레미(Salaam Remi)를 총괄 프로듀서로 붙여 바로 녹음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살람 레미는 에이미를 만난 첫 자리에서 그에게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에이미는 기타를 꺼내 “Girl From Ipanema”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살람 레미는 에이미에게 무언가 특별함이 있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약 1년의 작업 이후, 2003년 에이미의 첫 정규 앨범 [Frank]가 발매되었다. 앨범 제목 [Frank]는 에이미가 사랑하는 뮤지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에서 따왔으며, 재즈와 블루스를 힙합에 접목한 음악을 담았다. 앨범의 첫 싱글 “Stronger Than Me”는 에이미의 차트 성적 중 가장 낮은 순위인 71위를 기록하였다.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으나, 영국 평론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미디어는 그를 제2의 니나 시몬(Nina Simone), 혹은 에리카 바두(Erykah Badu)로 부르며 걸출한 여성 아티스트의 탄생을 알렸다. 반면, 피치포크(Pitchfork)나 롤링 스톤(Rolling Stone) 등 미국 평단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는 [Frank]가 미국에서 [Back To Black] 성공 이후인 2008년에 발매되어, 기대치가 2집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첫 싱글 발표 이후, “Take The Box”, “In My Bed” 등의 싱글을 내놓지만, 싱글 차트 성적은 큰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그 해 [Frank]가 머큐리 뮤직 프라이즈(Mercury Music Prize)와 브릿 어워드(Brit Awards) 베스트 브리티쉬 어반 액트(Best British Urban Act), 최우수 여성 아티스트 후보로 오르자 앨범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두 시상식에서 모두 상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앨범 판매량이 플래티넘을 기록하여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뮤지션으로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시간, 여자로서 최악의 시간이 공존한 [Back To Black]-

1집이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그의 유명세는 영국 내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에이미는 런던과 뉴욕을 오가며 음악작업과 공연을 하였는데, 에이미의 음악적 관심사가 재즈에서 60년대 소울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에이미는 뉴욕을 기반으로 90년대부터 활발히 활동한 훵크-소울 밴드 댑-킹즈(The Dap-Kings)를 백킹 밴드로 고용하였다. 이들 덕에 뉴욕 음악계에 에이미의 노래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뉴욕의 유명 인터넷 방송국 이스트 빌리지 라디오(East Village Radio)의 한 DJ가 특히 에이미의 노래를 자주 플레이하였다. 그 계기로 그는 에이미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 DJ가 바로 [Back To Black]의 프로듀서 마크 론스(Mark Ronson)이다.

당시 마크 론슨은 무명의 DJ였지만, 뮤지션이자 사교계 유명인사인 부모님 덕에 어렸을 적부터 팝 문화에 빠져 상당한 음악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미가 기본 멜로디를 만들어오면 마크 론슨, 혹은 살람 레미가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 셋 모두 60년대 소울 음악에 무한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1집 이후, 에이미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남자, 블레이크 필더-시빌(Blake Fielder-Civil)을 만나게 된다. 에이미와 블레이크는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였는데, 이 불안정한 생활은 에이미가 술과 마약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에이미가 약물 중독 증세를 보이자 아버지 밋치와 매니지먼트 팀은 그녀를 재활원에 보내려 했지만, 거부하였다고 한다. 재활원에 가도 짧은 면담만 하고 빠져 나오곤 했고, 급기야 자신의 해당 매니지먼트 팀을 해고하기까지 하였다. 마크 론슨과 에이미가 뉴욕을 거닐며 이 이야기를 하던 중, 에이미가 “No, no, no.”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론슨이 바로 멜로디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스튜디오로 직행하여 음악 작업을 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Rehab”이다.

에이미의 독특한 경험과 재기 발랄함이 합쳐진 가사와 쉬운 멜로디, 세련된 편곡의 “Rehab”은 에이미의 두 번째 앨범이자 생전 마지막 정규 앨범 [Back To Black]의 첫 싱글이었는데, 발매되자마자 젊은 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며 에이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이 무렵, 에이미의 외형에 변화가 생겼다. 레트로 소울이라는 앨범의 컨셉트처럼 굵은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머리를 부풀려 60년대 핀업걸 스타일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의 성공과 독특한 스타일로 가십지의 표적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른바 ‘에이미 와인하우스 스타일'로 대변되는 화장과 머리는 앨범을 위한 스타일링이기보단, 에이미의 자아정체성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얼굴과 다소 통통했던 에이미의 외형은 가십지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이 시기는 에이미가 본격적으로 약물에 중독되었던 때와 일치한다. 단기간 다이어트에는 성공하였으나, 가십면에 실리는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 대해 강박관념이 생겼고, 초라함을 느낄 때마다 아이라인을 굵게, 머리를 더 높이 띄웠다고 한다.

“Rehab”의 성공 덕에 [Back To Black]의 두 번째 싱글 “You Know I’m No Good”은 미국에서도 발매되었다. 이후, “Back To Black”, “Tears Dry On Their Own”, “Love Is A Losing Game” 등 후속 싱글이 연달아 발매되는데, 역시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2007년 후반에는 이미 셀러브리티로 거듭난 마크 론슨의 솔로 앨범 [Version]의 수록곡 “Valerie”가 싱글 커트되는데, 영미권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 곡은 영국 인디 밴드 주톤즈(The Zutons)가 2006년 발매한 동명의 싱글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하드 록 성향이 강했던 원곡이 론슨과 에이미의 손을 거쳐 모타운 소울 스타일로 거듭나게 되는데, 노래의 완성도를 차치하더라도, 당시 최고의 가십거리 에이미와 최고의 스타일리쉬 가이 론슨의 재결합이란 것만으로 대중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유명해지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미디어에 노출되려 하지만, 에이미는 달랐다. 당시 영미권은 ‘셀러브리티'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인터넷이 발달하여 쇼비즈니스와 관련 없는 사람이 유명세를 타고, ‘빅 브라더(Big Brother)'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리얼리티 쇼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아무 재능 없는 이들이 가십면을 차지하며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이들은 가십지의 원색적인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유명세를 위해 오히려 파파라치를 이용하였다. 음지에 있던 파파라치가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였고, 유명인의 사생활은 사라져버렸는데, 이 시기 파파라치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에이미였다. 애초에 셀러브리티로서 유명세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파라치에 대응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에이미는 그들이 자극적인 사진을 얻기 위해 일부러 던지는 욕설에 일일이 반응을 하였다. 그럴수록 가십지는 더욱 노골적인 사진과 모욕적인 카피를 붙였고, 자존감이 낮아질수록 에이미는 더욱 약물에 빠져들게 된다.

이 무렵,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브릿 어워드와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게다가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이른바 ‘빅4’라고 불리는 올해의 신인 아티스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아티스트에 모두 노미네이트되며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약물로 심신이 망가져버린 에이미는 가수의 역할을 어느 정도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미 어워드가 열리기 3일 전에 치러진 브릿 어워드에서 에이미는 초점 없는 눈빛, 불안한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며 대중의 비난을 샀다. 그런데다가, 약물 중독 전과로 미국 입국 비자를 거절당해 그래미 시상식 참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결국, 에이미는 위성 화면을 통해 그래미에 참석할 수 있었고,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무려 5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또한, 이보 노벨로 어워드(Ivor Novello Awards)에서 두 개 부문을 동시에 수상하는 최초의 아티스트가 되었다.

알 켈리(R Kelly), 스눕 독(Snoop Dogg)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스타들이 에이미와 작업을 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 에이미는 인생의 최악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남편 블레이크가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고 에이미 역시 일반인 구타로 경찰서를 출입하였다. 게다가 블레이크가 에이미와 함께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돈 때문이라는 인터뷰가 모든 가십지를 도배하면서 에이미는 이성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음악적 단짝 론슨과 관계도 소원해졌고, 이전까지 언론에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 밋치가 에이미가 블레이크와 헤어지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길 원한다는 인터뷰를 수차례 하기도 하였다. 2009년 초, 에이미는 드디어 블레이크와 이혼을 하게 된다. 이유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불륜. 블레이크에게 지나칠 만큼 헌신적이었던 에이미인지라 각종 매체는 이러한 이혼 사유에 놀라움을 표했지만, 대중은 에이미를 약물로 인도했던 장본인과 관계가 끊어진 만큼 뮤지션으로 재기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보였다. 하지만 에이미만큼의 음악적 재능이 있지만, 에이미만큼 약물에 빠져있던 뮤지션 피트 도허티(Pete Doherty)와 절친 관계를 지속하였기 때문에 상태는 그리 호전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새 남자친구이자 영화감독 렉 트래비스(Reg Traviss)는 에이미의 가족과 함께 에이미의 치료에 힘썼다. 트래비스는 에이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에이미의 심신은 새 앨범 작업이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까지 발전하였다. 다행히 론슨과도 재결합하여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트리뷰트 앨범 [Q Soul Bossa Nostra]에 참여하였고, 퀘스트러브(?uestlove)와 함께 새 그룹을 결성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살람 레미는 에이미의 새 앨범 작업을 위한 비트를 준비하였고, 에이미는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스눕 독과는 함께 녹음까지 하는 등 힙합 아티스트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또한, 새 앨범을 준비하며, 진지하게 랩 연습에 몰두하였는데, 만약 3집이 나왔다면, 에이미의 랩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에이미는 어릴 적 힙합 그룹을 결성했을 만큼 힙합 사랑이 대단하였다. 특히, 나스(Nas)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생일마저 9월 14일로 같아 그를 소울메이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집 “In My Bed”에서는 나스의 곡을 샘플링하고, 2집에서는 “Me & Mr.Jones”라는 곡을 만들었던 에이미는 살람 레미가 나스와 공동 생일파티를 제안하자 무척이나 행복해하였다고. 사후 앨범 [Lioness: Hidden Treasures]에서는 나스와 함께한 “Like Smoke”가 실리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앨범에 수록됐던 토니 베넷과 함께한 “Body And Soul”은 에이미의 마지막 녹음물이었다. 에이미의 할머니가 토니 베넷의 팬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베넷의 음악을 접하였다. 에이미는 토니 베넷을 통해 가수의 꿈을 꾸었을 정도로, 그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재즈 뮤지션이다. 그러므로, 베넷과 작업은 엄청난 영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앨범의 발매는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된다. 이 곡은 201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의 팝 그룹/듀오 곡 부문'을 수상하였다.

한편, 2011년, 에이미는 드디어 주변의 도움으로 마약을 완전히 끊게 된다. 하지만 음주 습관은 쉽게 고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약을 줄일수록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 번째 정규 앨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대녀(代女) 다이온 브롬필드(Dionne Bromfield)의 새 앨범 홍보에도 본격적으로 나서며 활동을 재개하였다. 특히, 한 때 에이미의 아류로 불렸던 아델(Adele)의 엄청난 성공을 보며 자극을 받아 하루빨리 앨범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투어에 들어갔지만, 심각한 음주 탓에 제대로 된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투어를 취소하고 다시 재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세르비아 공연의 일주일 후인 2011년 7월 23일.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캠든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고작 27세의 나이었다. 당시 알콜 농도는 음주 운전 적발 기준치의 네 배가 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체 불가능의 팝 아이콘, 에이미 와인하우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첫 앨범을 냈던 2003년, 영국 팝 시장은 알 켈리, 비욘세(Beyonce),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 등 미국 아티스트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걸스 얼라우드(Girls Aloud), 버스티드(Busted) 같이 상품화된 걸, 보이 밴드가 차트에 겨우 이름을 올리던 상황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 같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당시, 에이미는 레코드보다 라이브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였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클래식 재즈를 완전히 이해한 듯한 원숙한 목소리는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전성기를, 블루스 특유의 잿빛 리듬을 담은 매너는 디나 워싱턴을(Dinah Washington) 떠올리게 했다. 메이저 레이블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트렌드를 좇기보단 오히려 힙합과 재즈의 날 것과 같은 러프함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싱어로서 에이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재즈와 힙합을 본인의 것으로 체화하여 독특한 사운드를 담은 첫 앨범은 평단의 환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이미를 세계적 스타의 반열로 올린 두 번째 앨범 [Back To Black]은 첫 앨범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음악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과 외양의 변화는 10대를 갓 벗어난 소녀 재즈 보컬리스트를 자신만의 세계가 분명하고 문신 가득한 소울 디바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특히, 레트로 소울에 담은 진솔한 가사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에이미는 성에 대해 또래 여성 아티스트 중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노래하였다.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우선시 하고 성에 능동적이고 당당한 모습은 에이미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가 없었다. 또한, 세상의 아름다움만을 담으려 했던 기존 팝 가사와는 달리, 본인의 순탄치 않은 경험에서 우러나와 지독할 만큼 현실을 반영한 가사는 한 편으론 직설적으로, 한 편으론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겨울밤과 같이 어두운 에이미의 가사와 마크 론슨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편곡으로, 마치 한 편의 잔혹 동화 같았던 에이미의 노래에 영국의 젊은이들은 열광하였다. 2008년에 “Love Is A Losing Game”은 캠브리지 대학 영문학부 수업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월에 빛이 바래 창고 속에나 파묻혀있던 50~60년대 모타운 사운드가 에이미를 통해 부활하면서, 팝 음악의 판도도 변하게 되었다. 아델로 대표되는 포스트 와인하우스 제네레이션이 팝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짙은 아이라인, 부풀린 머리, 발레 슈즈로 대변되는 와인하우스 스타일은 길거리 10대뿐 아니라 콧대 높은 패션 하우스의 디자인에도 영감을 주었다. 2010년에는 의류브랜드 프레드 페리(Fred Perry)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디자이너로서 실력도 과시할 정도로 독특한 에이미 스타일은 장르불문 뒤따라 나온 대부분의 여성 가수가 영향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쾌하고 따뜻한 성격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그녀의 눈빛은 불안정한 시대 상황으로 당장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긍정을 강요당했던 불안한 우리의 청춘을 대변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20대의 나이에 단 두 장의 앨범으로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은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되었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는 음악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83.09.14 ~ 2011.07.23 'Amy Jade Winehouse'
Rest In Peace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민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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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 등록
  • Messlit
    1. Messlit (2012-07-25 13:44:23 / 118.33.55.**)

      추천 1 | 비추 0

    2. 읽으면서 막 거의 울뻔...ㅜ
      RIP
      좋은 음악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piano
    1. piano (2012-07-24 01:23:20 / 1.252.109.***)

      추천 1 | 비추 0

    2. R.I.P 와인하우스..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진짜 얼마나 좋아했는데 ㅠㅠ
  • 버기
    1. 버기 (2012-07-23 22:57:19 / 114.203.5.***)

      추천 1 | 비추 0

    2. 너무 여려서 그 삶의짐을 감당하지 못했던것 같아 더욱 연민이 가는 아티스트에요.
      하늘에서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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