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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수많은 힙합팬에게 ‘하트’를 선사하며 충격과 공포를 안기고 떠났던 세기의 힙합 스타 에미넴(Eminem)의 공연은 슬로터하우스(Slaughterhouse)라는 랩 괴물들의 무대를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가공할 랩 실력과 함께 저마다 사연 또한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다사다난했던 이를 꼽는다면, 바로 크루킷 아이(Crooked I)일 것이다. 지금이야 에미넴이라는 든든한 지지자와 동료들이 그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지만, 슬로터하우스 이전까지 크루킷 아이의 음악 인생은 지독하리만치 비운의 연속이었다.‘다음절 라임(Multisyllabic rhymes)’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가 처음 웨스트 코스트 힙합 씬에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평단과 팬들이 거는 기대는 남다른 것이었다. 현란하고 유려한 플로우는 물론이고 당시 동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가사적 미학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데뷔 이후, 무려 13년여가 지나도록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 한 장 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롱비치(Longbeach)의 소년, 랩퍼를 꿈꾸다
도미닉 위클리프(Dominic Wickliffe)가 본명인 크루킷 아이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이곳 저곳을 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마음 속에는 항상 훌륭한 랩퍼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7살이 되던 해, 아직 어린 나이의 크루킷 아이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당시 랩 게임에 뛰어들기를 원했던 두 명의 NFL 선수들과 인연 덕이었다. 그들이 자금을 조성하게 되면서 스튜디오까지 설립하기에 이르는데, 비록, 별다른 성과 없이 이 첫 발걸음은 끝을 맺게 되지만, 이때의 경험은 그가 계약 및 교섭 등 음악 비즈니스에 대해 매우 총명한 식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본격적인 기회가 찾아 온다. 롱비치 토박이이자 DPG(Dogg Pound Gangstaz) 라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프로듀서 빅 씨-스타일(Big C-Style)과 접촉하게 된 것이다. 크루킷 아이의 탁월한 랩 실력을 알아본 씨-스타일은 작업 중이던 자신의 컴필레이션 앨범 [C-Style Present 19th Street LBC Compilation/*필자 주: Bad Azz, Tray Deee, Bo-Roc 등 참여](1998)에 그의 참여를 요청했는데, 크루킷 아이는 기꺼이 앨범을 위해 무려 아홉 곡을 작업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빅 씨-스타일의 레이블 ‘나인틴스 스트리트 레코즈(19th Street Records)'와 계약이 성사되었으며, 그가 만든 곡 중 몇 개의 트랙이 곧 발표된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면서 비로소 정식으로 힙합 씬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나인틴스 스트리트 레코즈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씨-스타일의 레이블은 그보다 규모가 있는 누 트라이브(Noo Tribe) 아래 적을 두고 있었고, 누 트라이브의 음반 배급은 더 상위 레이블인 버진 레코즈(Virgin Records)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버진 레코즈가 누 트라이브를 급작스레 쳐내면서 나인틴스 스트리트 레코즈는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결국, 크루킷 아이는 1999년, 레이블과 결별을 결심한다. 그런데 마침 레이블의 CEO인 빅 씨-스타일은 대즈(Daz)와 함께 ‘데쓰로우 레코즈(Death Row Records)’의 하위 레이블 개념으로 ‘독 파운드 레코즈(Dogg Pound Records/*필자 주: 오늘날 ‘DPG Recordz’의 전신이다.)’ 설립에 한창이었다. 론칭이 가시화될 때 즈음, 씨-스타일은 크루킷 아이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그는 다시 한 번 그 부름에 화답했다. 비록, 드레(Dr.Dre)가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향력은 남아있었던 데쓰로우와 크루킷 아이의 악연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크루킷 아이가 당시 참여했던 컴필레이션 앨범들애증의 Death Row, 그 끈질긴 악연
확실히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은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가슴 설레는 일이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데 있어서 박차를 가하는 더 없는 기회의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크루킷 아이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가 ‘독 파운드 레코즈’와 계약하고 얼마 있지 않아, 상술적인 면의 극을 달리던 CEO 슈그 나잇(Suge Knight)에게 환멸을 느낀 대즈마저 ‘독 파운드 레코즈’를 독립 레이블로 떼어 데쓰로우를 탈퇴하게 되면서 그의 앞날에는 불운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때 대즈는 크루킷 아이에게 데쓰로우를 탈퇴하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제안했는데, 그는 레이블에 대한 지분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냥 데쓰로우에 남는 것을 택했다. 슈그 나잇이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들을 수혈하여 다시 태어날 데쓰로우 레코즈의 프론트 맨(Front Man) 자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소속 아티스트들 중 가장 먼저 앨범을 발매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만약, 그가 대즈와 함께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자신만의 앨범을 원했던 그에게 슈그의 제안은 분명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데쓰로우에서 첫 출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약속대로 슈그 나잇은 그의 앨범 제작에 전폭적인 후원을 해주었고, 드디어 첫 작품인 [Untouchable]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 될 사람은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듯이, 때마침 슈그 나잇은 각종 폭력 혐의로 기소되어 감옥을 들락날락하게 되고, 아무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것만 같던 데쓰로우 함선은 선장 잃은 배마냥 갈팡질팡하다가 급속히 침몰하기에 이른다. 자연스레 크루킷 아이의 앨범은 발표되지 못했다.
이에 엄청난 실망을 했을 법도 한 그는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데쓰로우에 남아 묵묵히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 5년여의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슈그 나잇은 데쓰로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그동안 참고 기다려 준 크루킷 아이에게 이미 완성되었던 [Untouchable]을 보완하여 좀 더 완벽한 앨범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한다. 이때 붙여진 앨범의 타이틀이 바로 [Say Hi To The Bad Guy]이다. 앨범에 앞서 레이블에서 제작한 영화 [Dysfunktional Family]의 사운드트랙 작업에 참여한 그는 수록곡이었던 “Still Tha Row"라는 곡으로 생애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건 싱글을 발표하면서 그의 앨범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팬들의 기대에 불을 지폈으며, 뒤이어 시스코(Sisqo)와 함께한 싱글 "So Damn Hood"까지 공개하면서 솔로작 발표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로소 음악 인생의 문이 활짝 열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미 이미지가 크게 손실된 데다가 씬에서 갖는 위치마저도 위태로워진 데쓰로우에서 활동은 여전히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크루킷 아이를 제외하고는 인지도와 실력, 모든 면에서 떨어지는 소속 아티스트들의 면면 탓에 일반 힙합팬은 물론,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마저도 외면받는 결과를 낳으며, 그의 존재감마저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사진: Death Row 시절의 크루킷 아이: 좌부터 Crooked I, Left Eye, Suge, Kurupt, Eastwood이에 커다란 위기를 느낀 슈그 나잇은 금세 크루킷 아이와 약속은 뒤로 한 채,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투팍(2Pac)과 스눕 독(Snoop Dogg)의 옛 음원들을 이용하여 레이블 살리기에만 급급해졌고, 자연스레 남는 장사가 될 확신이 들지 않았던 크루킷 아이의 앨범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인내했다. 우려먹기와 떨어지는 완성도로 많은 이의 원성을 샀던 투팍의 [Nu-Mixx Klazzics]라는 앨범에까지 참여하며, 데쓰로우를 떠나지 않는 지고지순한 순정(?)을 보여줬다. 슈그 나잇도 이쯤에서 그가 보여준 순정에 보답해야 했건만, 투팍 앨범 이후로도 크루킷 아이의 앨범은 차일 피일 미뤄지기만 했고, 이때부터 슈그 나잇을 향한 그의 불만은 극도로 쌓여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불행의 나날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비록,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크루킷 아이의 실력을 높이 사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던 대즈가 그의 사정을 알고는 사장되다시피 한 앨범 [Say Hi To The Bad Guy]를 DPG 레코즈를 통해 발매해주겠다고 손을 내민 것이다.
거의 명목상으로만 데쓰로우에 속해 있던 크루킷 아이는 이번엔 대즈의 손을 잡았다. 원래 완성되어 있던 앨범에 대즈가 프로듀싱한 새로운 곡들을 추가하여 [Say Hi To The Bad Guy: Special Edition]이라 이름 지어진 이 앨범에 대한 소식은 곧 DPG 레코즈의 공식 사이트를 통하여 홍보에 들어갔다. 그의 이름을 잠시 잊고 지냈던 웨스트 코스트의 힙합 팬들은 소식을 접하자 열광했고, 로컬 씬을 중심으로 하는 미디어들은 앞다투어 뉴스로 다루었다. 이번에는 크루킷 아이도, 많은 팬들도 ‘드디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악연을 끊고, 독립 아티스트로…
그러나 하늘은 그의 앨범 발표를 원치 않았던 게 분명하다. 앨범이 대즈의 레이블에서 발표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음악계의 난폭꾼 슈그 나잇은 크루킷 아이의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소속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훼방 놓기에 들어갔고, 기획 면에서 아직 완전치 않았던 DPG 레코즈의 사정까지 겹치면서 결국, 크루킷 아이 생애 첫 앨범의 발표는 또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을 맺었다. 이 사건 이후, 슈그는 크루킷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앨범 발매를 약속했지만, 다시 슈그의 끊임없는 감옥 드나들기가 반복되면서 결국, 그의 계약 만료시기인 2003년까지 앨범은 발매되지 못했다. 그렇게 팬들의 기대를 모으던 [Say Hi To The Bad Guy]는 영원한 어둠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나마 본작의 전신인 [Untouchable]의 미완 버전만 인터넷을 통해 불법으로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크루킷 아이는 데쓰로우에서 악몽 같던 시간을 끝내고 2004년, 드디어 발목을 죄던 데쓰로우를 빠져 나와 자신의 레이블을 론칭하고 독립 아티스트로서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어느덧 시간은 데뷔한 지 약 6년이나 지나있었다.
이사이에 크루킷 아이는 메이저 레이블 몇 곳과 접촉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닥터 드레의 애프터매스(Aftermath)였다. 그런데 드레는 [2001]과 에미넴의 [Marshall Mathers LP]를 먼저 발표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레이블들도 바로 앨범을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이에 메이저 시스템 안에서 앨범 발매가 미뤄지는 것에 지칠대로 지쳤던 크루킷 아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립 레이블 다이너스티 엔터테인먼트(Dynasty Entertainment)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Dubcnn’이라는 유명 웨스트 코스트 힙합 사이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독립 노선을 택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 앨범 한 장을 내기 위하여 여러 레이블들과 접촉하고, 그 속에서 계속되는 아픔과 실망의 연속에 이제 지쳤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음악계의 상업적인 비즈니스의 풍파 속에서 한때 촉망받던 젊은 뮤지션이 겪어야 했던 고초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대박 프로젝트 ‘Hip Hop Weekly’, 그리고 슬로터하우스(Slaughterhouse)
비록, 아주 늦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립 노선을 택한 건 잘한 결심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 인생이 슬슬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바로 빛이 든 건 아니었다. 중간에 또 한 번 데쓰로우와 소속 문제로 법적인 마찰이 있었고, 여전히 데뷔 앨범을 발매하는 건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아티스트와 순번 경쟁이나 외압 없이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환경만으로도 그에겐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던 2007년, 크루킷 아이는 ‘Hip Hop Weekly’라는 타이틀을 건 일종의 번개송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대박이 터진다. 그는 무려 2007년 4월부터 2008년 4월까지 기존 힙합 비트 위에 새로운 랩을 얹은 트랙을 매주 인터넷에 한 곡씩 발표했고, 그의 가공할 랩 실력에 매료된 이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해 힙합 매거진 [XXL]이 선정한 ‘주목해야 할 신예 10인’에 선정되기에 이른다. 랩 게임에 뛰어든 지 10년이 훌쩍 넘어서야 ‘신예’라는 타이틀을 얻으면서 팬들과 매체의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드디어 그의 존재감이 급상승했다는 점이었다.
사진: 좌부터 Crooked I, Joe Budden, Joell Ortiz, Royce Da 5'9‘Hip Hop Weekly’ 프로젝트 이후, 크루킷 아이는 디제이 후키드(DJ Whoo Kid), 디제이 펠리 펠(DJ Felli Fel) 등 유명 디제이들과 짝을 이뤄 믹스테잎 공습을 퍼부으며, 더욱 인지도를 높여 나갔다. 그러던 중, 2008년 10월에 발표된 조 버든(Joe Budden)의 디지털 앨범 [Halfway House]에서 지금의 슬로터하우스 멤버들인 로이스 다 파이브나인(Royce Da 5’9), 조엘 오티즈(Joell Ortiz)와 조우하게 된다. 이들이 함께한 곡의 제목이 바로 “Slaughterhouse”. 이 곡을 통해 서로의 실력과 궁합을 확인한 네 명의 랩퍼는 의기투합하여 슈퍼 랩 그룹인 슬로터하우스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필자 주: 원래 해당 곡에는 이들 외에도 Nino Bless라는 랩퍼가 참여했다.). 이듬해, 슬로터하우스는 많은 기대 속에 인디 레이블인 E1(예전 Koch)을 통해 첫 번째 앨범 [Slaughterhouse]를 발표했고, 크루킷 아이 역시 솔로 EP를 발표하며, 비록, 정규 1집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건 솔로작에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2011년, 슬로터하우스가 에미넴의 쉐디 레코즈(Shady Records)와 계약하면서 크루킷 아이는 다시 한 번 메이저에 입성하게 되고, 쭉 순탄한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크루킷 아이는 힙합 역사 속에서 손 꼽을 만큼 굴곡진 인생사를 가진 뮤지션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 판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운과 선택의 힘도 무시 못 할 요소라는 걸 몸소 체감하게 된다. 활동 기간과 결과물의 양은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올랐지만, ‘크루킷 아이’로서 진정한 커리어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화려한 라임과 현란한 플로우가 앞으로도 계속 뿜어져 나올 거라는 소리다. 우린 끊임없이 전율할 준비만 단단히 해두면 된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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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있고 착해 보이는 거..
앞으로 잘 될 일만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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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킷아이 성님ㅜㅜㅜ
1집만 기다리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