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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씨 ‘곰 세 마리’로 알앤비 스타일 됩니까?”
“그럼요. 곰 세 마리가 우어어허어허”이상은 버라이어티에서 이른바 알앤비로 분류된 가수들이 나오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방송의 재미를 위해 형식상 던지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알앤비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가 아닐까 싶다. 넘실거리는 바이브레이션을 중심으로 다이내믹한 애드리브만 넣어주면, ‘알앤비’가 되는 게 바로 우리나라다. 물론, 퍼포머의 특별한 보컬 스킬과 멜로디를 풍부하게 하는 다양한 애드리브는 알앤비 음악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알앤비에 필수적이다.’라고 할 만큼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개념조차 정리되지 않은 국내 알앤비 씬에서 단지 몇 마디의 멜로디와 애드리브로 음악이 표현된다는 사실이 거북한 것 또한 숨기기 어렵다.
잘 알고 있다시피 알앤비는 꽤 많은 장르를 포용하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소울, 훵크, 디스코, 콰이엇스톰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흑인음악 장르는 모두 알앤비로 분류되며, 알앤비와 함께 수평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알앤비’라는 장르의 요약은 ‘사랑을 주제로 한 발라드의 한 형태’가 아니라 작법 방식에 따라 세분화할 수 있는 종합음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곡의 진행 자체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하며, 흑인음악 특유의 텐션과 퍼포머의 기량에 기대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 발라드와 종종 구분이 어려운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발라드와 구분 짓기 위해 시도된 것이 ‘흑인에 가까운 목소리 비틀기’가 되었다. 기예에 가까운 꺾기나 애드리브를 넣으면 사운드는 분명 국내의 흔한 발라드임에도 ‘알앤비’로 탈바꿈이 충분히 가능하게 된 것이다. 피아노 선율로 시작해 웅장한 현악으로 끝나는 고리타분한 편곡에 ‘창법만 달리한 발라드’가 되어 버린 국내 메이저 알앤비의 현실은 그래서 결국, ‘알앤비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 번도 인기 있었던 적이 없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어떤 장르든 그렇겠지만, 알앤비 역시 사운드 메이킹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한 보컬 스킬이 필요한 만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스트루멘탈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온전한 장르음악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단지 어디어디의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모 유명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며, 기타를 누가 연주했는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것들은 사운드의 품질을 높이는 것이지 품목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현재 우리나라 알앤비 음악 대부분의 수준은 발라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국내 매체에서 알앤비 음악을 한다고 명명한 가수 대부분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변태된 상업적용도의 알앤비 음악을 하고 있다. 단지 앞서 말한 몇 가지 알앤비 보컬 스킬만으로 장르를 장악하고 있을 뿐, 완전한 장르로 보기 모호한 지점에 걸쳐있다. ‘만약, 힘과 기교를 뺀다면 과연 그것을 알앤비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알앤비도 큰 틀을 갖는 장르이니만큼 구조적인 면에서 일정 프레임을 가지며, 지켜야 할 작법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정서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르가 갖는 특징적인 사운드적 요소는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바람직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변형하는 것 또한, 말 그대로 ‘정서’만 불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기존 음악적 특징을 마모시키면서까지 굳이 알앤비를 들먹이는 이유를 난 잘 모르겠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앤비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었음에도, 보컬 스킬이 흑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로 여전히 껍데기만 알앤비 타이틀을 씌워주는 것은 도리어 대중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꼴뿐이 되지 않는다.
대중의 의식을 전환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티스트의 몫이다. 팝음악은 일부러 찾아 들어야 하는 한계가 있지만, 가요는 그보다 접하기 쉽고 받아들이기도 용이하다. 소비하는 대중의 요구나 각 아티스트의 취향의 문제가 아닌, 적어도 장르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제대로 된 사운드를 매개로 정확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창작자로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행보가 아닐까?
한때 국내에서도 알앤비 음악이 제대로 정착될 기회가 있긴 했다. 바로 90년대 초•중반이다. 당시 등장했던 솔리드나 유영진, 업타운, 듀스를 비롯해 브라운 아이즈, 초창기 휘성 등등, 당시 흑인음악을 표방했던 뮤지션들은 획일적인 메이저 씬의 음악 스타일을 벗어나 하나의 장르로서 알앤비를 담아냈고, 국내 정서와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은 상업적 가치로서도 증명을 보이며, 흑인음악이 국내 음악산업계에서도 하나의 화두가 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단기적인 성공과 이른바 흑인’필’의 보컬에 집중한 국내 사정은 결국, 좋은 것만 취하고 가려진 것은 버리게 되는 현상을 불러왔고, 알앤비를 ‘이도 저도 아닌 발라드’로 전락시켰다.
리스너들처럼 뮤지션들 또한 취향이 바뀌고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양한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과 교류로 인해 음악적 색채가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호도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며, ‘씬을 지켜라.’라고 요구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알앤비’란 타이틀을 내세운다면,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드는 게 옳다. 어차피 우리는 흑인의 정서를 100% 수용할 수 없으며, 설령 수용할 수 있다 해도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흑인은 그들만이 갖는 정서가 있고, 우리는 우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몇 가지의 스킬에 필요한 요소가 흑인이 갖고 있는 정서적 스타일과 작법이라면 적어도 그것만큼은 온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알앤비’를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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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예능프로그램에서 웃자고 한 것을 너부 크게 다루는것 같네요. 마치 한국사람이예요? 라고 짧은 시간에 가볍게 답변을 부탁했을시 한국말 몇마디 했다고 한국말하면 다 한국사람이 아니다고 꼬집는것 같네요.
가수보고 알앤비가수니 뭐니 하는거 다 본인들이 아닌 보고 들은 사람이나 기자들이 지어준 별명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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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서에 맞게 변형된건 더 이상 R&B 본연의 모습을 잃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국내 특성상 변형된 장르음악들은 뭔가 경계나 특성이 모호해져버리니까요.
명확히 어떤 장르를 정의하려면 구분되어지는 것이 있어야할텐데 그게 아니게 되어버리기 일쑤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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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면서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