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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화지
Album: ZISSOU
Released: 2016-02-02
Rating:
Reviewer: 예동현
랩퍼 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 가장 먼저 언급하는 부분은 가사에 대한 것들이다. 놀라운 결과물이었던 전작 [EAT]의 중심에는 그의 가사가 있었다.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냉철하게 시대상을 꿰뚫는 그의 작법은 적당한 은유와 암시로 더욱 독창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만만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지만, 그저 신세한탄이라든지 '그래도 난 꿈이 있으니까' 즈음의 낙관, 그도 아니면 ‘그런 거 모르겠고 놀고 죽자’ 수준의 현실도피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구체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 뚜렷한 자아를 구축해 이야기를 풀어낸 화지의 가사는 직관적인 가사에 자극적인 한 줄로 임팩트를 주려는 유형이 대세인 랩 씬에서 지극히 이질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는 [ZISSOU]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복잡하게 꼬아놓은 가사의 구조는 사실 은유와 암시를 걷어내고 그대로 보면, 상당히 직관적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라이밍을 위해 억지로, 또는 지적 허영의 과시를 위해 사용된 불필요한 단어나 구절이 거의 없다. 간혹 등장하더라도 냉소적으로 비꼬는 용도로 사용되거나 다른 생생한 표현과 함께 어우러져 묘하게 해롱대는 독특한 캐릭터 메이킹에 일조한다. 특히, 대부분 일상적 표현을 사용하여 편하게 이야기하듯 라임을 이어가는 화지의 랩이 표현 이상의 풍부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치밀하게 설계된 플로우 디자인 때문이다. 가장 탁월한 점은 절제력이다. 오직 라이밍만을 위한 구절은 철저히 걷어내고, 속도나 발성의 과잉을 통해 억지로 드라마틱한 연출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랩의 집중도를 유지하는 발음의 연속성과 완급조절을 통해 자연스럽게 청자를 클라이맥스로 유도한다. 절대 단순하지 않은 화지의 이야기를 편하게 따라가며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그 덕이다. [ZISSOU]의 훌륭한 점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거의 모든 면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랩퍼의 퍼포먼스를 통해 범상치 않은 앨범의 테마를 경험할 수 있다.
[ZISSOU]는 한 마디로 화지가 내세운 ‘21세기 히피’의 ‘헬조선 관람기’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배경의 팍팍하고 살벌한 느낌 때문에 '생존기', 혹은 '탈출기'가 아닌 관람기로 다가오는 것은 철저하게 유지되는 화지의 세계관과 태도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이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음에도 삶을 짓누르는 무게에 저항하기보다는 짓눌려 으깨지는 세상을 가장 앞에서 감상하는 관객의 위치에 선다. 우선 자신을 소개하고, 다음 벌스에서 그가 속한 한국힙합 씬을 사정없이 조롱한 뒤, 그러한 한국힙합 씬이 속한 한국, 또는 ‘헬조선’의 내밀한 모습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며, 청자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는 첫 트랙 “상아탑”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인트로다. 더해서 옆에 앉힌 청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한 "히피카예"는 더할 것도 없는 이 앨범의 요약본이다.
앨범은 전작과 비슷하게 개인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근본적인 지향점에선 조금 차이를 보인다. [EAT]이 화지가 사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 작품이라면, [ZISSOU]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화지의 태도에 대한 앨범에 가깝다. 그는 지난 에피소드를 잔뜩 풀어놓고 그것을 벌스 두세 개로 소비하며 설명하기보다는 청자가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삶의 단면들을 깔아놓고는 그것을 이죽거리고 비꼬거나("꺼져", "나르시시스트"), 대놓고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며("그건 그래", "UGK") 보편적 기준과 본인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태도 자체를 무기력한 현실부정이 아닌 현실 속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룬 성취로 끌어올리며, 앨범에서 내세운 새로운 히피의 모습을 구체화한다. 전 트랙의 프로덕션을 책임진 영 소울(Young Soul)의 비트 역시 [ZISSOU]의 성취다. 강한 울림과 절제미가 공존하는 드럼 운용과 감각적인 악기 소스의 사용으로 만들어내는 사이키델릭한 기운은 여전하며, “꺼져”, “그건 그래“, “나르시시스트” 등등, 중독적인 루핑을 기초로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능력은 단연 돋보인다.
다만, 그런 와중에 전반적인 무드가 비슷한 톤앤매너로 유지되는 점은 다소 아쉽다. 물론, 이러한 방향성을 납득할 수 있고, 분위기 환기를 위해 고심한 포인트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흐름상 몇몇 업템포 트랙들이 레이드-백(Laid-Back)한 트랙들 사이에서 묻혀버린 감이 없지 않다. 더불어 화지의 장기 중 하나인 보컬 후렴은 여전히 준수하지만,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매력이 떨어진다. 덕분에 강렬하게 리듬을 파고들며 거침없이 라임을 쏟아내는 "안 급해"는 앨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일관성 있는 앨범의 견고한 덩어리감은 더없이 훌륭하지만, 힘을 준 몇 개의 트랙이 더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규 데뷔작 [EAT]이 '화지는 어떤 놈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ZISSOU]는 '화지는 왜 이런 놈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만큼 모든 곡이 여러 주제 사이사이를 교차하며, 결국 화지라는 인물을 이해하도록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화지의 이야기에 비친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이 겪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ZISSOU]의 골자다. 모든 가사에서 숱하게 깔아놓은 깊이 있는 디테일은 화지라는 캐릭터를 차별화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동시에 그가 살고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는 강력한 복선으로 기능한다. 세상 속 청춘을 그린 주제 자체가 그다지 새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가 앨범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고하게 만들어 낸 도발적인 세계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음악적 구조의 세밀함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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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까말까한 후덜덜한 K힙합 클래식에게 고작 별 4개로 후려치는 깡다구는
어디서 나오는걸까?
요즘 리드머 쥐뿔 별거없네 ㅋ
추천 7 | 비추 2
게다가 그가 20대 후반을 보내면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굉장히 흥미로웠고 저의 삶과 대비되는 입장에서 내가 과연 화지와 마인드로 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앨범임에 분명하지만 1집때 처럼 뒤로 갈수록 비슷한 무드로 끝까지 이어져 살짝 지루한감이 들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였나 생각이 듭니다. 화지가 어찌보면 풀어야 할 숙제 일 수도 있구요
p.s1 화지의 팬으로서 스티브 지소의 해저여행은 꼭 보고 다시 이 앨범을 들어봐야겠습니다.
p.s2 화지는 역시 랩퍼의 랩퍼가 맞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