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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Dr. Octagon
Album: Dr. Octagonecologyst
Released: 1996-05-07
Rating:
Reviewer: 양지훈
쿨 키스(Kool Keith)는 힙합계의 대표적인 기인(奇人)이다. 툭하면 내뱉는 현실성 없는 발언이나 독특한 무대 퍼포먼스가 괴짜 이미지를 심어준 셈인데, 다수의 독특한 캐릭터를 소화했던 커리어가 기인의 이미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가 보여준 여러 캐릭터의 서막은 1995년 발표한 싱글 "Earth People"을 통해 공개된 닥터 옥타곤(Dr. Octagon)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키스는 마침내 첫 솔로 앨범 [Dr. Octagonecologyst]를 통해 그로테스크한 캐릭터 닥터 옥타곤의 자세한 면모를 공개한다.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쿨 키스가 가공한 여러 페르소나(persona)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평가 받는 닥터 옥타곤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설정의 캐릭터이다. 지구인이 아니라 외계인(목성인)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체 실험을 강행하고 은둔 생활을 즐기는 산부인과 의사 겸 외과 의사이다. 그는 서기 3000년에서 1996년으로 넘어왔다는 설정을 묘사한 "3000"을 통해 닥터 옥타곤이 시간 여행도 할 수 있는 캐릭터임을 알리고, "Earth People"에서는 'Earth People, New York and California / Earth People, I was born on Jupiter'라는 간단하면서도 묵직한 코러스로 닥터 옥타곤의 정체성(목성인)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 그만큼 좀처럼 짧은 수식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일단 본작은 성적 메타포와 묘사가 상당하다. 한 여성과 닥터 옥타곤의 대화를 담은 첫 곡 "Intro"에서부터 노골적이고 대담한 성적 묘사(sexual content)가 흘러 나오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병원에서 대화를 담은 스킷(skit)들 뿐만 아니라, "Girl Let Me Touch You"와 같은 곡에서도 생생하게 성적 표현을 쏟아낸다. 그렇기에 쿨 키스의 음악 세계가 낯선 이에게는 굉장히 낯뜨거운 소재가 되겠지만, 그의 커리어를 꾸준하게 관통하는 성적 콘텐츠에 단련된 이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광경이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뿜어 나오는 전례 없는 해학과 기괴한 무드가 일품이다.
앨범은 단지 '캐릭터가 독특하다'는 이유만으로 주목 받은 것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명쾌한 쿨 키스의 랩 딜리버리는 이 앨범에서도 빛을 발하며, 결정적으로 랩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프로덕션이 있었다. 앨범 전반에 걸쳐 활약한 프로듀서는 댄 더 오토메이터(Dan The Automator)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에는 서부 언더그라운드의 명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게 되지만, '96년에는 오토메이터의 이름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한 오토메이터를 택한 쿨 키스의 안목도 놀랍지만, 그가 주조한 사운드는 더욱 놀랍다. 신시사이저를 활용하여 만든 우주적인 사운드는 마치 앨범 전체가 하나의 트랙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전반적으로 몽롱한 분위기를 이끌다가도, 때로는 기타 리프와 드럼을 기막히게 조합해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이끈다("I'm Destructive"). 위대한 디제이 큐벗(DJ Qbert)의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닥터 옥타곤이라는 외계인의 이미지에 안성맞춤인 탈 장르적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그래도 이 앨범은 힙합이다.'라는 느낌을 들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게 그이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들리는 큐벗의 맛깔스러운 스크래칭은 오토메이터의 실험적인 범우주적 사운드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닥터 옥타곤이 워낙 독특한 캐릭터인 만큼, 배경 지식을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앨범의 감상 포인트는 그게 다가 아니다. 쿨 키스의 뚜렷한 목소리를 기반으로 한 딜리버리, 거침없는 직언, 독특한 플로우가 오토메이터의 비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훗날 매드립(Madlib)이나 엠에프 둠(MF Doom) 등등,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만든 다양한 캐릭터도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닥터 옥타곤만큼 특이하고 기이한 캐릭터는 힙합 역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또 다른 자아를 구상하는 지구상의 수많은 랩퍼에게 있어 이 앨범은 반드시 접해야 할 레퍼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족 1
앨범의 밀도 높은 사운드를 담당한 오토메이터의 2000년 작 [A Much Better Tomorrow]에서도 쿨 키스가 맹활약했다. 앨범에 수록된 트랙 중 절반 가까운 트랙에 쿨 키스의 랩이 담겨 있다. 현재는 베이 에어리어 힙합의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통한다.
사족 2
1999년 [First Come, First Served] 앨범에서 닥터 옥타곤은 쿨 키스의 또 다른 캐릭터인 닥터 둠(Dr. Dooom)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6년, 닥터 옥타곤은 [The Return of Dr. Octagon] 앨범에서 부활한다.
사족 3
명반의 숨은 공신이었던 디제이 큐벗과 컷마스타 커트(KutMasta Kurt)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쿨 키스와 파트너십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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