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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Noname
Album: Room 25
Released: 2018-09-14Rating:
Reviewer: 지준규
2016년 공개된 노네임(Noname)의 믹스테입 [Telefone]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가스펠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독창적인 플로우와 생생한 노랫말, 더불어 명석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유감없이 발휘된 그녀의 데뷔작은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본래 시인으로서 예술계에 발을 들인 노네임은 시적 언어들을 연속적으로 활용하여 흡입력 있는 가사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자칫 어려울 수 있는 추상적인 표현들 또한 거리낌 없이 사용했지만, 섬세한 단어 배치와 매끄러운 흐름을 통해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나아가 강한 여운까지 남겼다. 조금의 흥분이나 감정 소모 없이 차분한 어조로 일관하며 유연하게 전개하는 탄력적인 래핑 역시 집중과 깊이 있는 감상을 유도해냈다. 첫 번째 정규작 [Room 25]에선 이러한 노선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그녀의 한층 발전된 기량이 돋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확장된 가사의 스펙트럼이다. 주제 면에선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교적 소소한 일상이나 사적인 감정에서부터 폭력과 인종차별 등, 무거운 사회적 이슈들까지 골고루 다루지만, 그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차원 높아졌다. 낭만적인 미화나 과장된 수사 없이 그녀만의 시선과 언어로 새롭게 빚어낸 현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이고 흥미진진하다. 그 과정에서 생긴 치열한 고민과 사색의 흔적 또한 음악에 오롯이 녹아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노네임은 전작 발매 후 피처링으로 가끔 모습을 드러냈을 뿐, 그 어떠한 음악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쉬는 동안 고향인 시카고를 떠나 LA로 이사한 것이 큰 변곡점이 되었고, 그곳에서의 경험이 다양한 영감으로 이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그녀에게 2년의 공백기는 단순한 휴식이 아닌 몰입과 도약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탄탄한 완성도의 본작이 이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앨범은 마치 대화처럼 흘러가는 첫 트랙 “Self”에서부터 묵직한 이야기를 던지며 귀를 잡아끈다. 흥미롭게도 ‘Maybe this is the entrance before you get to the river, 아마 내 노래가 너를 강으로 이끌어 줄 거야’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곡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데, 여기서 강은 곧 인생, 또는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일상에 이 앨범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노네임의 포부가 담겨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자신감의 이유는 뒤이어 등장하는 트랙 “Blaxploitation”에서 바로 드러난다. 제목이 일러주듯 이 곡은 흑인에 대한 오랜 편견을 소재로 삼는다. 하지만 그녀는 차별과 혐오를 향한 무의미한 저항이 아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대신 흑인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착취와 수탈에 몰두해온 백인들의 악랄한 역사를 재치 있는 비유로 교묘하게 비꼬며 색다른 희열을 안긴다.
삶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은 마지막 트랙 “No Name”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 위에서 자신이 노네임(이름 없음)이라는 예명을 택한 이유를 담담하게 설명한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름이 가진 무게와 그에 따른 책임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회고하며, 이름을 버린 후에야 비로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후반부엔 각자 이름에 맞게 멋진 삶을 살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짙은 감흥을 선사한다.
이 외에도 종교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모순과 그에 기인한 여러 문제들을 통찰력 있게 풀어내는 “Prayer Song”, 사랑에 대한 진솔한 욕구와 그에 따른 방황을 감성적인 스토리텔링과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Window”, 노네임과 그녀의 오랜 음악적 동료 사바(Saba) 사이의 호흡이 돋보이는 “Ace” 등의 트랙들도 매력적인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앨범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전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베테랑 폴릭스(Phoelix)의 프로덕션이 장식한다. 노네임은 보다 자연스러운 호흡과 발성으로 별다른 기교나 낭비되는 음절 없이 정직한 랩을 내뱉는데, 이는 수록곡 전부를 담당한 폴릭스의 세련된 비트와 만나 아름다운 시너지를 낸다. 특히, “Prayer Song”을 화려하게 수놓는 재즈 사운드와 “Window”의 역동적인 드럼, 그리고 폴릭스가 직접 코러스까지 얹은 “Part Of Me”에서의 소울풀한 기타 연주는 백미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재즈 랩과 네오 소울의 황홀한 조합이자 부활이라고 할만하다.
노네임은 앨범 발매 직후 그동안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모든 글과 사진을 삭제하고 [Room 25]와 관련된 내용만 남겨두었다. 이는 새 출발은 물론, 과거와의 이별 또한 암시한다. 그만큼 노네임은 본작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과거를 거듭 반추하며, 상처를 치유하려 애썼고 매순간을 모두 음악 안에 담았다.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본작은 앨범이 거둔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떠나서도 훈훈한 감동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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