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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이쿄 (IKYO)
Album: 11:59
Released: 2021-04-28
Rating:
Reviewer: 강일권
랩의 원초적인 재미는 말소리의 조합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초창기의 랩이 그랬다. 그동안 많은 래퍼가 자음과 모음을 활용하여 저마다의 발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랩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강력한 확성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뒤에도 '귀에 감기는' 소리를 찾는 작업은 래퍼들의 주된 미션 중 하나다. 지난 2019년 오픈창동(OPCD)과 래퍼 화지의 주도 아래 진행된 '이주민 프로젝트' 출신 이쿄(IKYO)의 랩이 자아내는 감흥도 여기서 비롯된다.[11:59]를 들어보면, (비록, 아티스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말소리의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 흔적이 역력하다. 당장 뱉어지는 단어 하나하나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소리 하나하나가 전달하는 쾌감이 상당하다. 아무리 말소리에 신경 쓴 가사라 해도 래퍼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맛을 살리기 어렵다. 이쿄는 확실히 이 부분에서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 일단 듣는 재미만큼은 확실히 챙겼다.
플로우는 굉장히 주도적인 동시에 친화적이다. "Jazztext"에서 비트를 뒤에 달고 질주한다면, "WeeOoo"에서는 비트에 녹아들어 보폭을 맞춘다. 대체로 빠르게 진행되며 고막을 때리지만, 오로지 속도에 천착하는 속사포 랩이 주는 타격과는 또 다르다. 적재적소에 싱잉 스타일이 섞이면서 그루브가 형성되고, 윤기 흐르는 벌스가 완성됐다.
"인디언 기우제"에서 1절 후렴구가 끝난 뒤 가성으로 노래하는 부분은 좋은 예다. 시작부터 만들어진 타이트한 흐름을 효과적으로 이어서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이 같은 장점은 전곡의 후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사로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듯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랩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싱잉 스타일의 후렴구가 감흥을 더한다.
오투(The o2), 스콸로웨이브(Squalowave), 에볼 비츠(Evol Beats) 등등, 같은 이주민 출신의 프로듀서가 담당한 프로덕션도 탁월하다. [11:59] 안에서 발견되는 여러 장르 요소는 힙합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기보다 각 장르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이쿄의 랩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첫 곡 "Jazztext"를 보자. 베이스와 건반까지 연주한 오투의 프로덕션은 재즈를 샘플링하거나 재즈의 바이브를 구현한 힙합이 아니라 현대 음악의 비트 위에 놓인 프리 재즈에 가깝다.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작업하길 원하는 맘을 담은 이쿄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역시 오투가 만든 "인디언 기우제"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장르의 멜팅팟이다. 일렉트로닉풍의 드럼과 소울풍의 오르간, 힙합에서의 루프를 형성한 피아노, 그리고 중후반부의 재즈 트럼펫까지, 장르 퓨전의 진수가 담겼다.
곡 전반에서 스며나오는 느긋한 바이브 사이로 악기 및 보컬 샘플이 조화롭게 출입하는 스콸로웨이브의 "WeeOoo", 잔뜩 과장한 듯한 이쿄의 소울 보컬과 라가 정글(Ragga Jungle) 리듬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에볼 비츠의 "Rainbow" 등도 탁월하다.
다만, 이야기에서의 감흥은 크지 않다. 본작의 주제와 컨셉은 오투, 이쿄, 오터(Otter)가 합작했던 EP [23:59](2020)의 연장선이다. 시간대와 화자의 중심은 옮겨졌다. 이쿄의 가사에서는 창작할 때의 마음가짐과 과정, 그리고 아티스트로서의 바람처럼 원론적인 내용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듯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저 감정이나 의지를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주 세심하게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Jazztext"란 곡에서 우린 이쿄가 작사를 할 때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남다른 집착(?)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요즘의 다른 래퍼들과 분명히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생소한 신인 래퍼의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관으로 좁혀진 주제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인 가사는 랩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런데 이는 아티스트를 잘 모르더라도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가사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본작에선 이쿄의 랩이 지닌 소리적인 강점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처럼 느껴지고,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내용 면에서의 아쉬움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3번 곡의 제목이기도 한 '인디언 기우제'는 앨범에 담긴 이쿄의 심경과 각오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목표한 것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고 인내하는 것. 비를 내리고자 인디언들이 치르는 이 의식이 부족의 결속을 다지는 장치이기도 한 것처럼 [11:59] 자체가 이쿄란 아티스트의 인디언 기우제이기도 하다.
본작에 부여한 'R 셋'은 단 4곡이 수록된 앨범의 규모를 고려한, 일종의 핸디캡을 적용한 점수로 봐주길 바란다. 정규 앨범과는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즉, 꼭 EP여야 할 당위가 확실하거나 작은 규모를 뛰어넘을 획기적인 요소가 눈에 띄는 작품은 아니지만, 수록된 모든 곡의 완성도가 탁월하며, 이쿄와 참여 프로듀서들의 역량이 제대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11:59]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쿄의 행보에 시선을 계속 꽂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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