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
Artist: 버벌진트(Verbal Jint)
Album: 누명
Released: 2008-07-17
Rating:
Reviewer: 황두하
2008년, 버벌진트(Verbal Jint)는 누명을 썼다. 힙합 커뮤니티 게시판에 동료 래퍼들을 비난하는 글을 쓴 익명의 아이디가 버벌진트 아이디의 아이피 주소와 동일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사건은 오해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진아 사냥’에 나선다며 장르 팬들을 ‘수준이 낮다’라는 식으로 조롱하던 그의 날 선 태도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사건 이후, 버벌진트는 [누명]을 발표했다. 이 앨범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말과 함께. 앨범에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이들과 힙합 지진아들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커리어를 반복해서 읊으며 우월성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장르 팬들과 한국 힙합 씬 전체를 조롱한다.
이러한 태도는 2007년에 발표한 첫 정규 앨범 [무명]과도 이어진다. 그러나 결이 조금 다르다. ‘반복되는 패턴’에 지쳐 거의 포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처음부터 이어지는 세 곡의 인스트루멘탈(“편견”, “누명”, “선고”)를 지나 나오는 “망명”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이 같은 심정을 내비친다. 앨범 전반을 감싸는 침잠된 분위기는 지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버벌진트가 느끼는 환멸과 가사에 서려 있는 독기의 중심에는 ‘잘 만든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소년(“1219 Epiphany”)이 자라 힙합 씬을 발전시키겠다는 불 같은 열정(“불”)으로 이곳에 뛰어들었지만, 돌아오는 비난과 누명에 배신감(“Losing My Love”)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의 감정이 설득력을 갖는 건, 결국 놀라운 완성도의 음악 덕분이다. 샘플링을 배제하고 신시사이저를 중심으로 쌓아 올린 프로덕션은 ‘프로듀서 버벌진트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
더콰이엇(The Quiett), 오래된엘피, 로보토미(LOBOTOMY) 등이 제공한 개성 강한 비트 역시 앨범에 무리 없이 어우러지는 선에서 분위기를 환기한다. 다만, “Want You”와 “Circle”에 참여한 게스트들의 안이한 퍼포먼스는 앨범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지점이다
랩 퍼포먼스도 놀랍다. 자로 잰 듯 정확한 타이밍에 배치되어 그루브를 자아내는 라임과 물 흐르듯 유연한 플로우로 23곡에 달하는 분량을 단숨에 소화하게 만든다. 특히 시종일관 날카로운 퍼포먼스로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Tight이란 낱말의 존재 이유”는 버벌진트의 긴 커리어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지금 들어도 세련되게 느껴지는 건 오롯이 랩의 힘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누명]은 불친절하다. 단번에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인스트루멘탈 트랙이 산재해있고, 내러티브도 비선형적이다. 발매 당시 버벌진트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앨범 전반에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탄탄한 프로덕션과 퍼포먼스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다.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국 힙합 씬에서 이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의 앨범은 흔치 않다. 아티스트 개인의 역량이 넘칠 만큼 투영된 작가주의적 작품은 더욱 드물다.
한국 힙합은 미국처럼 거리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인터넷 커뮤니티다. [누명]이 발매될 당시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했던 힙합플레이야나 지금의 힙합엘이 같은 사이트는 씬이 돌아가는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래퍼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유명세를 얻기도 하고, 때론 큰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탓에 래퍼들은 종종 커뮤니티의 힙합 팬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부분 쉐도우 복싱으로 끝나거나,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과잉 대응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누명]의 차이가 여기서 비롯한다.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놀라운 퍼포먼스, 탄탄한 프로덕션이 어우러져 (버벌진트가 처음 시작한) ‘힙합 지진아 사냥’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려운 예다. [누명]은 한국 힙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음악으로 완벽하게 승화한 작품이다.
겉으로 봤을 때 버벌진트의 태도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해 보인다. 하지만 속에는 뜨거운 열정이 들끓고 있다. 한국 힙합의 발전과 자신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향한 열망이 [누명]의 진짜 주제라 할만하다.
두 번째 CD에 12개의 리믹스 트랙을 실은 건 이러한 열망의 발현처럼 다가온다. 특히 7가지 버전의 “투올더힙합키즈 투”는 신경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냉정의 탈을 쓴 뜨거운 열정은 버벌진트와 [누명]이 쓴 가장 큰 누명일지도 모른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황두하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
추천 1 | 비추 4
추천 3 | 비추 1
추천 2 | 비추 1
추천 1 | 비추 2
초판 친필 사인반 아직도 소장중입니다
추천 1 | 비추 2
잘 봤습니다.
추천 1 | 비추 1
(+내용중에 오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승하한 -> 승화한' 을 쓰려고 하셨던거 같아요.)
추천 2 | 비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