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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르의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중입니다. 단순히 크로스오버나 장르 퓨전을 넘어 얼터너티브 음악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죠.완성도는 탁월하나 장르의 모호함이 절정에 달하여 국내 앨범 베스트에 선정하지 않은 '국내 얼터너티브 앨범 베스트 5(무순위)'를 번외편으로 공개합니다.
※2021년 12월 1일부터 2022년 11월 30일까지 발매된 앨범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250 - 뽕
Released: 2022-03-18
250(이오공)이 내놓은 [뽕]은 2022년 단연 화제의 작품이었다. 힙합과 일렉트로닉 씬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가 어울리지 못할 것만 같은 트로트를 적극 포용해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했다. 직관적인 멜로디를 쏟아내는 신스, 특유의 리듬 패턴, 장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스와 사운드 질감을 트랙마다 끌어온다. 김수일, 이박사, 나운도, 양인자 등등 트로트계 인물과 대거 협업하여 결과물에 설득력을 부여한 점도 영리하다.
무엇보다 재현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트로트를 품으면서도 힙합과 일렉트로닉 프로덕션으로 기틀을 단단히 잡아냈다. 붐뱁 비트를 깔고, 퓨처 사운드를 풍성히 활용하며, 보컬 샘플링을 통해 기존에 잘하던 장르의 재미도 자연스레 녹여냈다. 전체적인 프로덕션에서 담백하고 깔끔한 사운드도 두드러진다. 트로트에선 주로 소스의 과잉과 사운드의 폭발이 특징이지만, [뽕]에선 필요한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트로트의 맛을 극대화한다.
250이 유튜브에 공개한 [뽕을 찾아서]에선 유쾌한 시선 속에 익숙지 않은 씬에 대한 존중과 자신만의 뽕짝을 찾고자 하는 열의와 압박이 담겼다. 누구도 뽕을 찾는 여정이 7년이나 걸릴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긴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결국 [뽕]으로 증명해냈다. 독창적이고 탁월한 뽕짝이 여기 있다.
김오키 - 안부
Released: 2022-04-08
대한민국에서 김오키만큼 부지런한 음악가도 없다. 2013년부터 2~3장의 앨범을 거의 매년 발표해왔고, 새턴발라드와 뻐킹매드니스 등 여러 팀 활동으로 꾸준히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놀라운 건, 발표하는 앨범마다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해오고 있는 점이다. 더불어 재즈를 기반으로 여러 힙합, 알앤비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블랙뮤직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음악을 선보여왔다. [안부]도 마찬가지다. 로파이(Lo-fi)한 힙합 사운드 위로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색소폰과 파도치는 소리가 어우러진 첫 트랙 “달빛”에서부터 이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앨범은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흘러간다. 이하이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별의 슬픔을 먹먹하게 전하는 발라드 트랙 “안녕”은 [안부]의 기조를 대표하는 트랙이다. 세 연주곡 “우리 만나고 헤어짐이 이미 정해져 있지 않기를”, “너와 너에게”, “다짐”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전부 드럼 없이 진행되면서 이별 후 남겨진 자의 상념과 미련을 담담히 전한다. 각각 9분, 10분, 7분의 긴 러닝타임이지만, 호수처럼 잔잔히 요동치는 사운드에 빠져있노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트랙 “노모어러브”에서는 엡마(Aepmah)가 참여해 기저에 끓어오르는 독특한 신시사이저로 일렉트로닉 장르의 기운을 더했다.
[안부]는 노랫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김오키의 색소폰 연주와 프로덕션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여태까지 발표한 앨범 중에서 사운드적으로 가장 차분하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매우 강렬하다. 김오키 음악의 새로운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버둥 - 너에게만 보여
Released: 2022-08-30
버둥은 본래 두 장의 EP에서도 들려주었듯이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젠 단순히 한 장르로만 그를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첫 정규작 [지지않는 곳으로 가자](2021)부터는 특정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얼터너티브 팝과 알앤비의 경계에 있는 [너에게만 보여]에선 훨씬 단단하고도 견고하게 구축한 버둥의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제비"에선 포크의 작법이 활용되고, "분명"과 "신과 함께"에선 디스토션 걸린 기타와 함께 록 사운드를 뿜으며, 코러스와 현악 소스가 두텁게 사용되어 이야기에 맞는 무드를 조성한다. 동시에 "그네"를 비롯해 대다수의 곡 구성에서 알앤비 프로덕션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구축한 덕에 섣불리 특정 틀로만 묶기 어려운, 독특한 질감의 프로덕션이 완성되었다.
가사는 존재와 삶에 대한 응원가를 담았다. 한영혼용 없이 한국어로 펼칠 수 있는 밀도 높은 은유와 표현 방식이 무척 훌륭하다. 물론 보컬 퍼포먼스까지도 탁출하다. 마치 현악기처럼 수려한 음색에 넓은 음역을 활용한 테크닉이 캐치한 멜로디와 시너지를 이루고, 감정을 더욱 가멸차게 만든다. [너에게만 보여]는 정규작에 이어서 또 한 번 버둥이라는 아티스트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제 모두에게 보이고 들리도록 응원해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유라 & 만동 -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
Released: 2022-11-21
첫 곡을 듣는 순간 무섭게 빠져드는 앨범이 있다. 알앤비와 일렉트로닉을 넘나든 싱어송라이터 유라, 크로스오버 재즈와 록의 경계에 선 밴드 만동이 함께 만든 이 작품이 그렇다. 재즈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 실재는 여러 장르가 뒤섞여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얼터너티브 음악 덩어리다. 이제 ‘탈장르’는 트렌드에 가까워졌지만,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에서 다시 한번 시도에 방점이 찍혔다. 프로덕션, 보컬, 연주, 가사 전부 절묘하며 독창적이다.
콘트라베이스로 주도하는 초반부에 이어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로 전이됐다가 자연스레 회귀하는 “지느러미 (The Fin)”, 마이너풍의 어쿠스틱 팝처럼 시작되어 소울, 익스페리멘탈 재즈(Experimental Jazz), 네오포크(Neofolk)가 뒤섞이는 “축 (Sag)”처럼 한 곡안에서도 장르의 변화와 화합이 거듭된다. 그런가 하면, 재즈 퓨전과 (실제 연주 기반의) 재즈 힙합의 경계에 있는 “돛이 있다면야 (If There's a Sail)” 같은 곡도 있다.
유라의 보컬은 양가적이다. 쌀쌀하게 가슴을 짓누르다가도 포근하게 어루만지기를 반복한다.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며, 탁월한 메시지까지 녹인 가사가 더해져서 전위적인 앨범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틀에서 벗어나 보이고 싶은 강박이나 알량한 허세로부터 비롯된 가사들과는 질이 다르다. 감연한 실험과 처연하고 매혹적인 무드로 완성된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는 올해 가장 ‘증폭되는 물음’을 던진 작품이다.
힙노시스 테라피 - HYPNOSIS THERAPY
Released: 2022-10-27
제이플로우(Jflow)는 그간 여러 팀과 솔로 활동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왔다. 히피는집시였다 이후로는 래퍼보다는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보이는 중이다. 그가 이번에는 일렉트로닉을 주원료 삼아 방향을 틀었다. 파트너는 와비사비룸의 동료이자 래퍼 짱유. [HYPNOSIS THERAPY]는 댄서블하고 실험적인 사운드에 짱유의 에너지 넘치는 랩이 어우러진 앨범이다.
단순한 리듬 파트 위로 여러 질감의 신시사이저가 천천히 쌓이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2002 Korea”, 클랩 스네어와 전자 베이스로 완성한 단출한 뭄바톤 리듬의 “+82”, 과장된 신시사이저와 디지털 가공한 보이스 소스가 맞물려 빠르게 내달리는 “Medusa” 등, 장르적으로 탁월한 완성도의 트랙들이 죽 이어진다. 비슷하면서도 각각 색깔이 뚜렷한 3분 내외의 10트랙이 이어지며 마치 잘 짜인 DJ 셋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폭발적인 샤우팅 랩이 사운드와 잘 어울리는 “Daze”처럼 온전한 벌스를 들을 수 있는 트랙도 있지만, 보컬에 이펙트를 잔뜩 걸어 보이스 소스처럼 활용한 “Benz”나 몇 가지 단어를 반복하는 “Medusa”, “Reality”처럼 랩이 악기처럼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Wikipedia”에서는 자신의 양력을 내레이션으로 읊으며 랩 못지않은 묘한 리듬감을 느끼게 만든다. [HYPNOSIS THERAPY]는 제이플로우와 짱유 각각의 커리어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제이플로우의 음악 스펙트럼이 우리의 예상보다 더욱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짱유의 랩 퍼포먼스 또한 힙합 안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말에 발표된 리믹스 앨범까지 듣는다면, 이들의 활력 넘치는 리듬에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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