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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선진&격&덥덥이
Album: Arkestra
Released: 2023-04-08
Rating:
Reviewer: 강일권
재즈계의 진보적인 실험주의자이자 기인이었던 선 라(Sun Ra)는 밴드 이름으로 오케스트라(orchestra)대신 '아케스트라(arkestra)'를 사용했다. 왜 이 같은 표기를 썼는지는 미스터리다. 일각에서는 ‘방주(ark)’란 단어에서 남다른 의미를 유추했다. 상업적 가치 추구나 왜곡에 훼손되지 않은 예술, 혹은 예술가의 피난처. 선 라는 오래 전 지구를 떠났기에 앞으로도 그가 남긴 오묘한 상징의 적확한 의미는 알 수 없을 것이다.그런 ‘아케스트라’가 2023년 한국에서 울려 퍼졌다. 프로듀서 선진(Sun Gin)과 두 래퍼 격, 덥덥이(dubdubee)는 합작 앨범 제목으로 ‘Arkestra’를 내세웠다. 선 라가 그랬듯이 실체를 명확히 하진 않는다. 그들의 ‘아케스트라’는 오염되지 않은 예술이나 힙합일 수도, 그런 예술이 유일하게 보존되는 이상향일 수도, 그러한 예술에 위협이 되는 악을 제거해 주는 절대적 존재일 수도, 이 모든 것의 집합일 수도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왜곡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만의 힙합으로 결실을 보겠다는 비장함 속엔 아케스트라에 대한 찬미와 열망으로 그득하다. 마치 기도 끝의 아멘처럼, 아케스트라는 열렬한 예술관을 드러내는 많은 곡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랩을 시작했던 과거를 되짚거나(“Hard Digging”), ‘쇼미더머니’가 지배해 온 오늘날의 힙합 씬을 냉소할 때에도(“Homo Drumiens”) 그렇다.
그래서 마지막 곡이 끝나면 두 래퍼의 간증을 들은 것만 같다. 앨범 전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실하고 곧은 기운이 상당하다. 종교가 없음에도 경건해질 정도다. 이렇듯 정해놓은 길을 단 한 차례도 벗어나지 않는 주제의식과 서사의 흐름이 작품의 짜임새를 강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꼭 감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아케스트라’가 지닌 모호하면서도 성스러운 상징성이 앨범의 축축하고 오묘한 무드와 어우러지며 자아낸 흥미는 곡이 거듭되며 다소 옅어진다. 모든 가사의 초점이 덥덥이와 격도 “Possession”에서 말했듯이 ‘그들만 볼 수 있는 초월적인 단 하나뿐인 형상’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종교를 믿지 않거나 관심 없는 이가 경전을 접했을 때와 비슷하다. 처음엔 신비하고 경건한 이야기에 매료되지만, 반복되면 흥미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Arkestra]는 설교가 아닌 라임과 플로우로 구성되었다. 래퍼들의 개인사도 어우러진다. 하지만 랩 가사 특유의 재미를 위한 장치가 부족한 탓에 마지막까지 그들의 외침에 몰입하긴 어렵다.
다행히 앨범은 탁월한 프로덕션과 탄탄한 래핑으로 완성했다. 선진의 프로덕션은 드럼을 최대한 배제한 채 샘플 프레이즈 중심으로 구성한 이른바 ‘드럼리스(drumless) 힙합’에 바탕을 둔다. 전부터 해온 시도가 비로소 환하게 빛을 발하며 듣는 내내 정서를 지배한다. 선진은 확실히 이 같은 스타일의 정수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리듬이 사라지거나 희미해진 상태에서 샘플을 어떻게 다듬고 운용해야 하는지, 오리지널 드럼리스 힙합으로부터의 영향, 즉, 범죄 누아르 사운드트랙 같은 무드와 질감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등등, 고민과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아랍 지역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 혹은 이집트 배경의 판타지 영화에서의 부감 숏이 그려지는 “Arkestra”, 삭막하고 광활하게 펼쳐지는 루프 끝에 스패니시 기타를 떠오르게 하는 연주가 애잔함을 자아내는 “Visualization”은 대표적이다.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 카(Ka)로부터 부각되어 그리젤다 레코즈(Griselda Records)가 꽃을 피운 드럼리스 힙합의 감흥을 고스란히 전한다. 특히 이그니토(IGNITO)의 메시아적인 랩이 가세한 “Visualization”은 [Demolish]의 스핀오프처럼 다가온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피처링이 돋보인 곡이다.
에티오피아 피아니스트 티기스트 에지구(Tigist Ejigu)의 “Yematebela Wof”에서 가장 미려한 연주 부분을 샘플링하여 진공 속에 갇힌 듯한 드럼 위에 얹은 “Purgatory”, 역시 재즈 음악에서 따온 것 같은 건반의 미세한 왜곡과 둔탁한 드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Tim Duncan"에선 선진의 무르익은 샘플링 감각이 빛난다. 의미가 담긴 내레이션을 삽입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인 점도 인상적이다.
그런가 하면, “Artisanship”은 왜곡한 보컬 샘플과 소리의 조합으로 완성됐다. 드럼리스 힙합보다는 익스페리멘탈 힙합(Experimental hip hop)에 가까운데, 흐름상 전혀 이질감 없이 이어진다. 앨범에서 가장 역동적인 드럼과 베이스가 어우러져 긴장감을 몰아오는 “Homo Drumiens”도 빼놓을 수 없다. 딱 중간 지점에서 비교적 전통적인 붐뱁 사운드로 분위기를 환기해 준다.
드럼리스 프로덕션은 랩에서의 그루브 형성에 기틀이 되는 리듬 파트가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로우가 다소 제한적이다. 래핑 자체가 선사하는 쾌감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덥덥이와 격은 주제를 함축하고 견고한 라임 구조를 바탕으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붐뱁 프로덕션에서도 마찬가지다.
덥덥이의 랩이 비트를 은근히 압박하듯 전개된다면, 격의 랩은 비트를 채근하듯 나아간다. 둘의 랩이 끊임없이 조화하고 마찰하며 잔뜩 팽창된 선진의 프로덕션과 더불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드물게 벌스 안에서 라인을 주고받는 “Hard Digging”은 퍼포먼스 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 중 하나다.
드럼리스 힙합은 원래 마피아 세계관과 범죄 픽션을 수반한다.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을 중심으로 이 작법이 널리 쓰이게 된 배경이 해당 주제와 무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프로덕션과 가사는 불가분의 관계나 다름없다.
하지만 한국 힙합 씬에 유입되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여과될 수밖에 없다. 래퍼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똑같이 범죄 이야기를 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선택하고 집중한 앨범의 주제는 앞서 언급한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아쉬움 한편으로 장르의 특징과 분위기에 잘 부합했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만에 접하는 진중하고 ‘돈이 아닌 것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는 앨범이다. 이찬혁의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란 가사에 일부 동감하면서도 '쇼미더머니'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여전히 멋을 잊지 않은 힙합 또한 존재한다. 이 앨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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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스도 고작 티켓 몇천장이 안팔려서 무료공연으로 전환하는 상황이면 말 다했지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암넷의 쇼미더머니도 조만간 셔터 내릴테고, 거품 싹 꺼진
국힙의 쌩얼을 보게 될 날이 얼마 안남은듯 ㅋ
근데 과연 그때까지 살아남을 랩퍼가 몇명이나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