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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 필진이 선정한 '2023 국외 알앤비/소울 앨범 베스트 10’을 공개합니다. 아무쪼록 저희의 리스트가 한해를 정리하는 좋은 가이드가 되길 바랍니다.※2022년 12월 1일부터 2023년 11월 30일까지 발매된 앨범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Adi Oasis - Lotus Glow
Amaarae - Fountain Baby
Berhana - Amén (The Nomad's Dream)
BJ the Chicago Kid - Gravy
Cautious Clay - Karpeh
Cleo Sol - Heaven
Dreamer Isioma - Princess Forever
Durand Jones - Wait Til I Get Over
Masego - Masego
Sampha - Lahai
10. Corinne Bailey Rae - Black Rainbows
Released: 2023-09-15간혹 사람은 의외의 순간에 큰 영향을 받고 변화하기도 한다.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에겐 몇 년 전, 시카고에서 열린 흑인 역사 전시회를 방문한 일이 그랬던 것 같다.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Black Rainbows]를 통해 느꼈을 감정과 생각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차분하고 감미롭게 귀를 녹이던 모습은 크게 줄었고, 대신에 소울과 록의 경계에서 호전적이며 화끈한 결과물을 들려준다.
“Erasure”에선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사이로 비집고 발악하는 듯이 날 것 같은 소리를 외치고, “Put It Down”에서는 묵직하게 타격하는 드럼과 베이스 소스와 함께 절규처럼 들리는 기괴한 보컬 및 코러스를 빚어냈다. “He Will Follow You With His Eyes”에선 농밀하고 끈적한 모습과 냉정하고 차가운 면모를 동시에 표현했다. 기존에 들려주지 않았던 보컬 스타일과 가사로 다양한 소재와 주제, 그리고 이미지를 풀어낸 점이 무척 강렬하다. 완성도 높은 프로덕션 덕에 그 의도가 더욱더 빛을 발한다.
알앤비와 소울을 앨범의 중앙에 두었다. 다만, 하나로 쉽사리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장르를 끄집어냈다. 특히 면면을 살펴보면 마치 특정 아티스트의 곡을 가져와 수록한 듯이 한 장르에 특화된 곡으로 즐비하다. 재즈의 문법에서 비정형과 비구조화를 통해 감정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Black Rainbows”, 사이키델릭 록의 품에서 기타가 매섭게 폭발하는 “A Spell, A Prayer”, 개러지 록의 양분으로 사운드를 폭발시키는 “Erasure”, 일렉트로닉의 토양에서 소리를 끊임없이 조합한 “Put It Down”까지. 그중에서 최고는 역시 “New York Transit Queen”이다. 2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곡 길이부터 구성까지 펑크 록(Punk Rock)의 미덕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개별 곡의 장르적인 묘미가 엄청나며, 다양한 순간을 자아낸 덕에 부족한 통일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진다. 파편화된 폭발이 연쇄작용 하면서, 앨범이 끝날 즈음엔 원자폭탄처럼 엄청난 감흥으로 연결된다. 코린의 찰나가 낳은 굉장한 복귀작이다.
9. Daniel Caesar - Never Enough
Released: 2023-04-07
음악 세계를 폭넓게 그려낸 대니얼 시저(Daniel Caesar)의 이전 음악들과 달리 [Never Enough]는 정교하다. 빈티지하면서도 몽환적인 무드를 일관적으로 유지한다. 다만, 섬세한 변주가 곡마다 특성을 살린다. 그 중 “Always”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트랙이다. 미니멀한 키보드 사운드로 시작해 드럼 사운드가 맞물려 다른 곡들과 비슷하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중반부부터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한다. 1970년대 소울 음악에서 자주 사용된 시타르 기타가 멜로디에 어우러지며 빈티지한 소울 사운드를 훌륭하게 구현했다. 보컬 퍼포먼스도 일관적인 분위기를 구축하는 데에 한몫한다. 그는 팔세토 창법으로 부드러운 질감의 보컬을 뽑아내는 데에 능하다. 여린 듯하면서도 단단한 보컬이 가스펠 사운드에 적절히 녹아든다. 특히 “Superpowers”에서 잘 드러난다. 악기 사운드로 화려하게 사운드를 축조하기보다 촘촘하게 보컬을 쌓아 유려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대니얼 시저의 음악은 마음에 보슬비를 내리는 것만 같다. 과거로 기운 마음을 현재로 데려온다. 포근한 기타 사운드와 함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너는 나의 베스트 파트’라고 고백하고, ‘내 손을 잡아주면 다시 사랑을 찾겠다 약속’한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사랑을 쓴다. [Never Enough]에 담긴 곡들도 대개 사랑 노래다. ‘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가사의 구성이 편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지 않고 마음만을 전한다. 편지는 사랑을 고백하는 가장 성실한 방법이다. 추상적으로 떠오르는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가장 알맞은 단어를 골라 적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고요한 프로덕션과 조화를 이루며 성실한 사랑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조형됐다.
[Never Enough]는 조금 심심하게 들릴 수도 있다. 비교적 다양한 장르를 오가지 않을뿐더러 차분함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개별 곡의 개성보다는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무드에 집중한 느낌이다. 그러나 세밀하게 쌓아 올린 프로덕션과 그 위에서 유영하는 사랑의 말들은 더할 나위 없다. 삶의 곡절마다 펼치게 되는 오래된 편지처럼 자꾸만 읽고 또 읽게 된다.
8. Bastards Of Soul - Give It Right Back
Released: 2023-11-17
밴드 바스타즈 오브 소울(Bastards Of Soul)는 2016년부터 텍사스 댈러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라이브 밴드이다. 이들은 수없이 많은 공연을 통해 실력을 쌓았고, 2020년부터 앨범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두 장의 정규 앨범 [Spinnnin’](2021), [Corners](2022)은 이들의 농익은 소울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Give It Right Back] 역시 마찬가지다. 유려한 현악기 연주로 필리 소울(Philly Soul)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This Love”과 “Try a Little Love”, 관악기 연주가 흥을 돋우는 펑크(Funk) 넘버 “While It’s Hot”, 각각 블루스와 스윙 재즈를 기반으로 한 “Woman of Hell”과 “It’s Gonna Be Alright” 등등, 복고적인 알앤비/소울 사운드를 제대로 구현해냈다. 특히 여러 악기가 적재적소에서 잘 활용되어 역동적인 밴드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연주곡 “Bbq In Paris”는 밴드의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곡이다.
프론트맨인 채드윅 머레이(Chadwick Murray)는 지난 2021년 지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향년 45세). 앨범엔 채드윅이 생전에 녹음한 트랙이 다수 수록되었다. “You Let Me Down Again”, “The Truth Ain’t Change Your World” 같은 트랙은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이 담긴 가사와 채드윅의 소울풀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진한 여운을 남긴다. 더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밴드의 음악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Give It Right Back]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 Jamila Woods - Water Made Us
Released: 2023-10-13
강렬하게 귀를 울리는 음악만이 다가 아니다. 때로는 메시지에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단순하고 잔잔한 무드가 일관적이어서 평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서사가 아쉬움을 지워버릴 만큼 매력적인 경우도 있다. 자밀라 우즈(Jamila Woods)의 [Water Made Us]가 그렇다.
프로덕션은 전반적으로 선형적이다. 그 안에 느린 템포의 곡과 단순한 리프 및 악기 연주로 잔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 중간마다 삽입된 인터루드, 변화가 크지 않은 보컬과 코러스로 곡을 꽉 채우는 일관성까지 마치 유기성을 위해 모든 초점을 한 곳에 집중시켰다. 가사 면에선 블랙 커뮤니티나 사회적인 문제를 노래했던 이전과 달리 사람과의 관계, 사랑,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겼다.
좀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강연 중 한 구절인 '모든 물은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를 인용해 주제를 선정하고, 삶에 대해 탐구하는 모습은 이전보다 더 친밀하게 다가온다. 맥킨리 딕슨(McKinley Dixon)이 발매한 [Beloved! Paradise! Jazz!?]도 마찬가지로 토니 모리슨의 작품에서 인용해 개인적인 삶을 탐구했다. 이런 따뜻함과 인간적인 모습이 겹쳐 보이는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6. Kelela - Raven
Released: 2023-02-10
[Raven]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공간감을 강조한 신시사이저로 부유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Washed Away”에서 개러지(Garage) 사운드를 차용한 “Happy Ending”으로 이어지고, 리듬 파트를 강조하지 않은 채 차분히 흘러가는 “Let It Go”로 다시 가라앉는다. 이러한 연출은 앨범의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신스와 로파이(Lo-Fi)한 질감의 믹싱으로 일관성이 느껴지는 가운데서도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어 역동성이 느껴진다. “Contact”와 “Fooley”, “Raven”과 “Bruises”처럼 트랙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은 지점도 특기할 만하다. 마치 잘 짜인 디제이 셋처럼 유기적으로 흘러간다.
앨범의 주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안개로 둘러싸인 물가를 표류하는 모습을 묘사한 첫 번째 트랙 “Washed Away”는 이러한 감정의 비유다. 앨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사는 ‘far away’다. 케레라가 지난 7년간 느꼈던 고독함과 고립감을 함축하는 어휘다. 그는 저 먼 곳에 있어서 손이 닿지 않는 ‘무언가’를 추구하며 느리지만 끊임없이 헤엄쳐 나간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Raven]이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이어졌다.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사운드 구성과 연출, 그리고 주제 의식이 완벽한 퍼즐처럼 들어맞는 한 폭의 유려한 그림 같다.
5. Victoria Monét - Jaguar II
Released: 2023-08-25
빅토리아 모네(Victoria Monét)의 [Jaguar II]는 은은하게 빛을 내는 윤슬 같다. 트랙의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조화롭다. 부주 밴턴(Buju Banton)을 초빙하여 댄스홀을 엮은 “Party Girls”와 거친 비트가 인상적인 “Alright”가 초반에 자리하고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알앤비 기반의 잔잔한 프로덕션이 길을 잃지 않는다. 전체적으론 70-80년대 알앤비/소울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럭키 데이(Lucky Daye)가 목소리를 얹어 끈적한 분위기를 만든 “Smoke”를 시작으로 섹슈얼함을 뿜어내는 “Cadillac”, 왈츠풍의 “How Does It Make You Feel”을 지나 고즈넉함을 자아내는 소울 재즈 “Good Bye”까지, 빅토리아 모네는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11곡을 끈끈하게 엮어냈다.
악기 배치가 주효했다. 브라스가 중추 역할을 하며 곡마다 쾌감을 심어준다. 가장 인상적인 브라스 파트는 “On My Mama”에서 나온다. 후렴 부분에서는 은근하게 스며들지만, 곧이어 제 모습을 강하게 드러낸다. 찰리 보이(Chalie Boy)의 “I Look Good”을 샘플링한 부분에서다. 대담하게 등장하여 단숨에 분위기를 바꾼다. 변주로 곡을 탁월하게 연출한 점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모네는 가벼운 소재부터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소재에 따라 분위기를 조정할 줄 안다. 그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다. 주관이 중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On My Mama”나 “I’m The One”처럼 섹슈얼리티가 주된 소재인 곡에서도 화자의 생각을 소상히 풀어낼 줄 안다. 성적인 상황을 자극적인 소재로만 대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정답 없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다. 곡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빅토리아 모네는 정답 없는 질문들을 꾸준히 상기하며 아마 자신만의 답을 만들었을 것이다. 삶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사람은 인생에 대한 명확한 주관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자신만의 빛을 뿜어낸다. 그래서 [Jaguar II]가 더 빛나는 앨범인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프로덕션에 빅토리아 모네의 음악적 역량이 부족함 없이 투입된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취향과 인생에 대한 철학까지 완연하게 담겼다. 재규어가 정확하고 대담하게 목표물을 포착하는 것처럼 빅토리아 모네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Jaguar II]에 담아 대담한 결과물로 만들어 냈다.
4. Jessie Ware - That! Feels Good!
Released: 2023-04-28
[That! Feels Good!]은 제시 웨어(Jessie Ware)가 직전에 들려준, 근사했던 기조를 이어간다. 여전히 주체할 수 없도록 신나는 프로덕션을 들려주면서도, 분명히 다른 곳에 방점을 찍었다. 전작에선 신스팝을 중점에 두고 펑크, 디스코, 소울을 버무렸다. 이번엔 하우스와 펑크로 얼개를 지었다. "Free Yourself"가 대표적이다. 제목부터 하우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클리셰 표현을 내걸었다. 소울풀한 보컬 운용, 건반과 브라스 소스의 과잉, 때려 붓는 코러스, 곡의 전개 방식까지 전형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진부하다는 느낌은 떠오르지 않는다. 제시의 시원시원한 보컬과 잘 어우러지고, 초반 흥을 돋우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장르적인 묘미를 잘 살렸다.
하우스와 펑크가 주를 이루면서 보컬이 부차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음에도, 40분 내내 주도권을 거머쥔 목소리도 강점이다. 풍부한 화음과 반복되는 멜로디 사이로 보컬이 튀어나온다. 시원하게 쭉쭉 뻗는 고음에 로빈 에스(Robin S.), 울트라 나테(Ultra Naté), 바바라 터커(Barbara Tucker) 등등, 대표적인 하우스 디바가 떠오를 만큼 소울풀한 기교와 힘이 넘치는 가창력이 특히 듣는 맛을 곱절로 끌어올린다. 60-70년대 소울 넘버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미디엄 템포의 “Hello Love”, 90년대 알앤비를 끌고 온 “Lightning”을 배치하여 차분한 분위기에 고음 이외에 중저음과 다채로운 테크닉을 과시한 선택도 영리하다. 이처럼 다채로운 프로덕션 사이에 풍성한 퍼포먼스를 내민 덕에 구심점이 유지된다.
[What's Your Pleasure]가 잘하는 것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That! Feels Good!]은 완숙한 단계에 이른 결과물로 느껴진다. 댄스 플로어가 뜨겁게 달궈지면서 그 열기가 식지 않고 들끓는다. 진한 만족감을 주는 끝내주는 앨범이 제시 웨어의 디스코그래피에 또 하나 추가됐다.
3. Kali Uchis - Red Moon In Venus
Released: 2023-03-03
[Red Moon In Venus]에서는 칼리 우치스(Kali Uchis)의 이전 두 결과물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과 장점을 한껏 취했다. 인트로 “In My Garden…”을 지나 "I Wish you Roses"부터 카랑카랑한 신스와 묵직하고 차분하게 깔리는 비트에 농염하게 사랑을 노래했다. "Moral Conscience"에선 떨리면서 축축한 목소리로 바이브레이션을 들려주는 동시에 팔세토 가창과 고음을 내질러 감정을 가멸차게 표현한다. “Moonlight”에선 트랙을 겹겹이 쌓은 코러스와 에코 사운드에 속삭이듯 힘을 쭉 뺀 보컬이 주도한다. 프로덕션이 주조한 몽환적인 무드에 퍼포먼스가 가미돼 감흥이 증폭된다.
이번에 도드라지는 또 다른 특징은 스페인어다. 모든 가사에 스페인어를 포함했던 전작과 달리, 두세 곡 정도로 비중이 크게 줄었다. 다만, 언어에서 맛볼 수 있는 감흥은 더욱 늘었다. “Not Too Late”이 색다르게 들리는 것도 다국어 사용에서 비롯된 힘 덕분이다. 사랑을 갈망하는 섹슈얼한 내용은 자주 시도했던 것이기에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어 후렴구 사이에 다른 언어로 된 벌스(Verse)가 틈입하면서 여느 곡과 상이한 무드가 환기된다. 또한 스페인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치하면서 두 언어 간 악센트와 발음적인 특징이 비교되고 부각된다. 말의 맛까지도 자연스레 살아난다.
프로덕션은 지난 앨범보다 라틴 뮤직의 요소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레트로 소울을 필두로 진득한 완성도가 돋보인다. 그중 가장 뛰어난 순간은 “Worth the Wait”이다. 붐뱁 비트 위로 수많은 이펙트와 소스가 얹혔고, 몽환적인 칼리의 보컬 사이로 오마르 아폴로(Omar Apollo)의 중독적이며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의 팔세토 보컬이 강렬함을 주입했다. 짜릿한 데뷔작을 내놓았던 칼리는 어느새 세 번째 정규까지 다다랐다. 그동안 변화를 수반하면서도 장점과 개성만큼은 잃지 않아 결과물에 진득이 배어 났다. 칼리의 점성술로부터 비롯된 사이키델릭하고 달콤하며 미묘한 소울에 이번에도 현혹되고 만다.
2. SZA - SOS
Released: 2022-12-09
[SOS]는 시자(SZA)의 성장물이다. 23곡, 약 1시간 8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복잡한 이별의 감정을 하나하나 뜯어 자세히 묘사한다. 가사가 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이어서 쉽게 동화된다. 마지막 트랙 “Good Days”에 이르러서는 큰 안도감과 해방감이 느껴진다. 앞선 21곡 동안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건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는 프로덕션이다. [Ctrl](2017)에도 참여했던 프로듀서 카터 랭(Carter Lang)과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한 롭 바이젤(Rob Bisel)은 여러 프로듀서와 협업하며 알앤비, 힙합을 기반으로 한 트랙들 사이 사이에 그런지, 록, 포크 등의 장르를 섞어 넓은 스펙트럼의 사운드를 구축했다. 장르적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팝적인 터치를 적절히 가미한 멜로디로 귀를 사로잡는다. 그중에서도 “Kill Bill”, “Gone Girl”, “Nobody Gets Me”, Open Arms”의 후렴구는 시자의 탁월한 멜로디 어레인지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SOS]의 커버는 고 다이애나 비가 생전 마지막으로 파파라치에게 찍혔던 사진을 차용한 것이다. 이별이라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시자의 모습에서 극도의 고립감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가 ‘SOS’를 외치며 도움을 구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SOS]는 2023년 미국 대중음악계를 통 틀어 가장 큰 상업적 성과를 올린 앨범 중 하나다. 앨범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자연스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1. Liv.e - Girl In The Half Pearl
Released: 2023-02-10
리브(Liv.e)의 두 번째 정규앨범 [Girl In The Half Pearl]은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극단을 보여준다. 알앤비를 기반으로 일렉트로닉, 인더스트리얼, 힙합, 재즈, 엠비언트 등등, 다양한 장르가 해체와 재조합을 반복하며 난장이 펼쳐진다. 먹먹한 질감의 신시사이저와 드럼 앤 베이스를 차용한 리듬 파트가 어우러지는 비트 위로 낮게 읊조리는 보컬이 중심을 잡아주는 첫 곡“Gardetto.”는 앨범의 복잡하고 넓은 사운드스케이프를 대변한다.
“Ghost”, “HowTheyLikeMe!”, “NoNewNews!!!”처럼 댄서블한 곡과 “Heart Break Escape”, “Wild Animals”, “Our Father”처럼 침잠된 무드의 곡이 교차되는 가운데 일렉트로닉 성향이 강한 소스가 중간중간 난입해 일정한 기조를 유지한다. 파격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사운드지만, 앨범을 끝까지 들으면 하나의 긴 곡을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 닿지 못할 사랑에 대한 갈망과 우울은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흘러가다가 “Ghost”의 말미에 ‘Just wanna get back home’이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보컬은 감정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전까지의 자신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묘사한 “RESET!” 이후 다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여정으로 바뀌는 구성도 굉장히 극적이다. “NoNewNews!!!”에서 매트릭스의 빨간 약, 파란 약 설정을 빌려오는 등 독특한 표현과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사, 그리고 말하는 것처럼 감정선에 따라 변화하는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Girl In The Half Pearl]은 2023년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동시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정서를 품은 획기적인 알앤비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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