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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 필진이 선정한 '2023 국외 랩/힙합 앨범 베스트 10’을 공개합니다. 아무쪼록 저희의 리스트가 한해를 정리하는 좋은 가이드가 되길 바랍니다.※ 2022년 12월 1일부터 2023년 11월 30일까지 발매된 앨범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Aesop Rock - Integrated Tech Solutions
Danny Brown - Quaranta
Earl Sweatshirt & The Alchemist - Voir Dire
IDK - F65
Killer Mike - MICHAEL
LB199X - Stigma
Lil Yachty - Let’s Start Here.
Mick Jenkins - The Patience
MIKE - Burning Desire
Nas - Magic 2
10. ICECOLDBISHOP - Generational CurseReleased: 2023-06-16
아이스콜드비숍(ICECOLDBISHOP)의 정규 데뷔작을 듣고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good kid, m.A.A.d. city](2012)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90년대 웨스트코스트 힙합 사운드에 경의를 표한 프로덕션, 쉰 목소리부터 높고 날카롭게 왜곡된 목소리에 이르는 다양한 톤의 래핑, 이를 통해 탁월한 리리시즘(Lyricism)과 스토리텔링으로 녹인 개인의 투쟁사까지, [Generational Curse]는 마치 [good kid, m.A.A.d. city] 의 좀 더 황량한 버전 같다.
폭력, 마약, 범죄로 건설된 후드에서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비숍은 내재된 트라우마와 분노를 도시 안팎에 대한 묘사와 함께 처절할 만큼 솔직하게 뱉어낸다. 흑인 빈민가의 처참한 현실을 초래한 미국 정부는 그의 주요 타깃이다. 제목부터 적나라한 “The Gov’t Gave Us Guns(정부가 우리에게 총을 줬어)”는 대표적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부시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연설 장면까지 동원하며 비판 의지를 강조한 “D.A.R.E.”도 비숍과 이 앨범이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매우 정치사회적인 힙합임을 방증한다. 그의 뛰어난 퍼포먼스는 전통적인 웨스트코스트 힙합 스타일과 이를 응용한 짜릿하고 독특한 스타일의 비트와 만나 매 순간 연소한다. 특히 쥐펑크(G-Funk)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Til The End", "Focused", 클라우드 랩 사운드에서 쥐펑크로 변주되는 “D.A.R.E." 등은 과거에 대한 존경과 현재의 정서를 버무리는 황금 레시피와도 같다. 올해 가장 놀랍고 강렬한 데뷔작 중 하나다.
9. KAYTRAMINÉ - KAYTRAMINÉ
Released: 2023-05-19[KAYTRAMINÉ]를 주도하는 건 케이트라나다(KAYTRANADA)의 프로덕션이다. 시종일관 넘실대는 신시사이저와 리듬 파트가 몸을 흔들게 한다. 여기에 청량한 질감의 소스와 샘플을 활용해 여름 파티의 분위기를 가득 불어넣었다. 아미네(Aminé)는 낮게 읊조리며 강약을 조절하는 랩으로 흥을 끌어올린다. 스킬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석적으로 리듬을 밟아나가다가 중간마다 포인트를 주어 분위기를 환기한다.
랩이 비트를 주도하지 않고 비트와 하나인 것처럼 어우러지며 흘러가는 맛이 좋다. “4EVA”나 “STFU3” 등은 아미네의 랩과 비트가 최상의 합을 보여주는 곡이다. 파티 현장을 묘사하며 능글맞게 섹슈얼한 매력을 어필하는 가사도 인상적이다. 게스트도 적재적소에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letstalkaboutit”에서 속도감 있는 랩을 선보인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의 벌스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KAYTRAMINÉ]는 아미네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되어줄 만한 작품이다. 케이트라나다는 기존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아미네가 마음껏 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다. 아미네도 이에 맞춰 보다 여유롭게 역량을 표출했다. 올여름 파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울려 퍼질 ‘파티 앤썸’이다. [KAYTRAMINÉ]는 한 마디로 2023년의 ‘여름이었다.’
8. El Michels Affair & Black Thought - Glorious Game
Released: 2023-04-14
레온 미셸스(Leon Michels)의 소울 밴드, 엘 미셸스 어페어(El Michels Affair)와 더 루츠(The Roots)의 프론트맨 블랙 쏘웃(Black Thought)의 합작은 어쩌면 예고된 성공과도 같았다. 이미 래퀀(Raekwon)과의 합작 등으로 힙합 음악에 대한 애정과 결과물을 증명한 적 있는 밴드와 더 이상 검증이 필요 없는 배테랑 래퍼의 조합. 더욱이 소울과 펑크라는 정체성 아래 작업물의 큰 범주를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의 합작 [Glorious Game]는 예상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물로 완성되었다.
엘 미셸스 어페어의 프로덕션은 단 한 번도 성급하게 치고 나가지 않는다. 그저 블랙 쏘웃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무대를 선물하는 듯하다. 그들은 완성된 곡을 만들고, 다시 그 일부를 추출해 샘플링하는 등 독특한 작업 방식을 통해 소울 밴드로서의 정체성과 힙합의 장르적 색채를 한 손에 잡는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템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소울풀한 프로덕션 위로 블랙 쏘웃의 시적인 표현과 스토리텔링이 빛을 발한다.
“The Weather”은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블랙 쏘웃은 그가 자란 사우스 필리의 풍경과 온도, 냄새 등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기묘하게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하는 프로덕션과 이에 멋지게 따라붙는 블랙쏘웃의 랩은 몰입감을 더하는 요소다. [Glorious Game]는 블랙 쏘웃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일인극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다. 탁월한 연주와 프로덕션, 블랙 쏘웃의 밀도 높은 가사 덕분에 강한 응집력을 느낄 수 있다.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만들어진 동시에,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다.
7. Conway The Machine - WON’T HE DO IT
Released: 2023-05-05
지난해 정규작 [God Don’t Make Mistakes] 발매를 앞두고 콘웨이 더 머신(Conway The Machine)은 그리젤다 레코즈와의 결별을 발표했다. 다만,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 배니 더 부처(Benny the Butcher) 등 멤버들과의 관계는 문제없어 보인다. 여전히 대린저(Daringer)의 프로덕션이 앨범의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전 그리젤다 동료의 피처링이 앨범의 한편을 차지한다.
첫 두 트랙, “Quarters”와 “Brucifix”로 타이트한 붐뱁과 드럼리스를 선보인 앨범의 방향성은 이내 다채롭게 선회하기 시작한다.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의 두 트랙, 가스펠 베이스의 “Kanye”, 이어서 경쾌하게 치고 나가는 “The Chosen”이 등장할 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랩과 가사는 여전히 탁월하다. 그는 이뤄낸 성취를 기념하고 과시하는 한편, 총과 마약을 이야기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때론 그를 둘러싼 부조리한 상황에 고뇌한다. “Monogram”, “Kanye”를 통해 두 명의 우상, 제이지(Jay Z), 칸예 웨스트(Kanye West)와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선보이기도 한다. 객원의 활약도 뛰어난데, 그중에서도 러브더지니어스(7xvethegenius)의 랩은 특기할 만하다. 앨범의 막바지에 참여하여, 서정적이고 타이트한 퍼포먼스로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을 차지한다.
[WON’T HE DO IT ]는 콘웨이가 원하는 변화와 확장을 엿볼 수 있다. 기존의 커리어를 통해 쌓아놓은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한 동시에, 다음 단계로 뻗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앨범과 동명의 트랙 “WON’T HE DO IT”에 이르러, 그는 “it's Drumwork forever, It's Griselda forever(영원히 드럼워크고, 영원히 그리젤다야)라고 외친다.
6. Larry June & The Alchemist - The Great Escape
Released: 2023-03-31
[The Great Escape]는 한마디로 ‘멋’이다. 래리 준(Larry June)은 재생 시간 내내 자신의 럭셔리한 라이프 스타일을 아주 구체적으로 전시한다. 알케미스트(The Alchemist)가 제공한 샘플링 기반의 비트는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래리 준의 랩에 설득력을 더한다. 크로스타운 익스프레스(Crosstown Express)의 “Let Me Try”를 샘플링한 비트 위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고급진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묘사한 “Porsches In Spanish”는 앨범의 기조를 가장 잘 대변하는 트랙이다.
래리 준은 앨범 내내 아주 느긋하고 유려한 플로우로 일관한다.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 차분하지만, 그 사이로 자연스레 리듬을 밀고 당기는 기술적인 쾌감이 전달되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게스트와의 합도 인상적이다. 볼디 제임스(Boldy James), 에비던스(Evidence), 제이 워시(Jay Worthy) 등은 래리와 비슷한 듯 다른 스타일로 앨범을 다채롭게 해준다. 가장 인상적인 건 빅 션(Big Sean)이다. 그는 “Palisades, CA”에 등장해 순식간에 속도를 올리는 플로우로 분위기를 확실하게 환기한다.
알케미스트는 매년 수많은 래퍼들과 협업하며 양과 질을 보장하는 몇 안되는 베테랑 프로듀서가 되었다. [The Great Escape]에서 그는 그 어느때보다 부드럽고 소울풀한 비트로 래리 준의 랩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준다. 본인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파트너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주는 그의 센스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덕분에 래리 준 역시 기존의 색깔을 지키면서 커리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5. Billy Woods & Kenny Segal - Maps
Released: 2023-05-05
비범한 아티스트의 합작을 마주할 땐 언제나 설렌다. 이를테면 뉴욕의 래퍼 빌리 우즈(Billy Woods)와 엘에이의 프로듀서 케니 시걸(Kenny Segal)이 그렇다. 두 재능이 2019년 [Hiding Places] 이후 다시 만났다. 코로나의 위협에서 벗어나 다시금 바빠진 투어 일정 중에 만든 [Maps]는 빌리 우즈도 설명했듯이 ‘포스트 팬데믹’ 앨범이다. 강제적으로 칩거해야 했던 그들의 벼른 여행 기록이자 길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물론 낭만적이거나 평범한 여행기와는 거리가 멀다. 우즈와 시걸은 유머, 냉소, 스토리텔링, 공포, 그리고 변화무쌍한 프로덕션으로 지도를 완성했다. 우즈는 몇 차례에 걸쳐 황금기 힙합을 거론하지만, [Maps]의 음악은 전통적인 뉴욕 힙합과 지극히 실험적인 얼터너티브 힙합이 불규칙하게 혼재한 결과물이다. 글리치 요소를 적극 끌어온 첫 곡 “Kenwood Speakers”부터 프리 재즈의 자유로운 코드 진행과 템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석적 래핑으로 주도하는 “Blue Smoke”, 기존의 힙합 드럼 패턴에서 벗어난 리듬과 변칙적으로 삽입된 루프 및 사운드 소스가 어우러지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 “Hangman” 등등, 비선형적 구성이 돋보이는 곡으로 그득하다.
그런 가운데 멜로디의 힘 또한 순간순간 살아나는 곡이 절묘하게 포진했다(“Soft Landing”, “NYC Tapwater”, “The Layover”). 이 같은 프로덕션은 때때로 초현실주의까지 나아가는 우즈의 가사와 만나 [Maps]를 어떤 이상세계에 대한 기록처럼 여겨지게 한다. 부디 이들의 합작이 계속되기를. 마지막 곡이 끝나갈 때쯤이면 이 생각이 간절해진다.
4. McKinley Dixon - Beloved! Paradise! Jazz!?
Released: 2023-06-02
매킨리 딕슨(McKinley Dixon)이 재즈 힙합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마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연상케 하는 블랙 커뮤니티와 개인적인 서사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이를 방증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트릴로지 [Beloved], [Jazz],[Paradise] 세 작품에서 영감받아 선형적인 서사를 구성하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죽음과 폭력,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의 관계, 현실적인 문제 세 가지 테마를 한데 엮어놓은 작사 능력은 그의 큰 장점 중 하나다.
다채로운 스타일을 소화하는 랩 퍼포먼스도 발군이다. 공격적인 래핑과 톤은 대니 브라운(Danny Brown)과 제이펙마피아(JPEGMAFIA)를, 뛰어난 리듬감과 재지함은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특히 큐팁(Q-Tip)을 연상케 한다. 프로덕션 역시 뛰어나다. "Run, Run, Run"에서 퍼커션을 중심으로 피아노, 베이스가 주를 이루고, 그 위 쌓이는 관악기들이 만들어낸 통통 튀는 리듬감은 특히 인상적이다. 강렬한 관악기 연주와 여러 악기들을 차분히 쌓아 폭발적인 소리를 내는 "Live! from the kitchen Table", "Beloved! Paradise! Jazz!?"는 단연 하이라이트다. 금관, 목관 악기와 현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트랩 사운드를 얹은 "Tyler, Forever" 같은 비범한 프로덕션도 독특하다.
대부분 재즈 음악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높은 완성도가 전형성의 함정을 파괴한다. 이미 선행된 스타일이지만, 재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들어볼 이유가 충분한 걸작이다. 차세대 재즈 힙합 아이콘의 디스코그래피의 큰 획이 바로 여기 그어졌다.
3. Little Simz - NO THANK YOU
Released: 2022-12-12
리틀 심즈(Little Simz)의 새로운 앨범 [No Thank You]는 데뷔부터 함께한 레이블 에이지 101 뮤직(AGE 101 Music)과 결별하고, 새로운 레이블 포에버 리빙 오리지널스(Forever Living Originals)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그는 앨범을 통틀어 흑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거짓과 유혹의 목소리들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진실을 노래하는 걸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개인의 문제와 사회 전반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하고, 그를 지켜주는 주위 사람들을 신이 보내준 ‘천사’라고 일컫는 첫 트랙 “Angel”부터 방향성이 드러난다.
이번에도 전곡의 프로듀싱을 맡은 인플로(Inflo)는 [GREY Area](2019)의 단출한 구성과[Sometimes I Might Be Introvert]의 웅장한 사운드를 절충했다. 극적인 연출과 스케일이 큰 사운드 전개는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심즈의 랩은 인플로가 깔아놓은 사운드 위를 자유롭게 활보한다. 특히 느릿하게 흘러가며 라임을 끊지 않고 죽 이어가는 “Gorilla”와 피아노만으로 진행되는 단출한 사운드 위로 랩을 뱉으며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Control”은 어느새 베테랑이 된 심즈의 물오른 랩 퍼포먼스를 즐길 수 있는 곡이다.
앨범의 또 다른 조력자는 알앤비 싱어송라이터 클레오 솔(Cleo Sol)이다. 클레오는 전곡에 코러스로 참여하며 사운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클레오, 심즈, 인플로는 오래 전부터 음악적 교류를 해온 동료들이다. 레이블 포에버 리빙 오리지널스는 본래 클레오와 인플로의 밴드 솔트(Sault)만이 소속된 곳이었다. 음악 산업 안에서 겪은 온갖 잡음들 속에서 진정한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마지막 곡 “Control”과 이어지는 지점이다. 가장 화려할 수 있는 순간, 심즈는 지근거리의 사람들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No Thank You]다.
2. Noname - Sundial
Released: 2023-08-11
노네임(Noname)은 그간 일상의 순간부터 사회의 현상까지 소재의 폭을 넓게 가져갔다. 새 앨범에선 너비는 유사하면서도 깊이에서 차이를 확실히 나타냈다. 현실에서 정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면모를 강하게 나타내는 것과 유사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주위의 사회와 시스템에 관한 발언을 중점으로 담았다. 톤과 랩의 빠르기만 듣는다면 무척 차분하고 평온하게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뱉어내는 노랫말은 강력하면서 공격적이다.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평화와 안전을 위협받는 흑인의 현실, 여성이 마주하고 부딪혀야만 하는 장벽과 불평등을 쉼 없이 끄집어낸다. 단편적인 현실의 문제점을 짚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까지 지적해 현실을 비판한다.
이처럼 다층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앨범 내내 이어진다. 표현까지 노골적이기 때문에 아주 불편하고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노네임의 굉장한 랩이 수반되어 그의 입장과 별개로 설득력 있고 즐겁게 다가온다. 때론 편안하고 여유롭게 소리를 내면서, 다른 순간엔 재빠르며, 타이트하게 이어간다. 다양한 플로우에 음절과 음운을 디테일하게 구성하고, 이야기를 오밀조밀하고 치밀하게 꿰어 래퍼로서의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했다.
각운을 치밀하게 맞추면서도 소재를 흩뜨리거나 가사의 밀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단순히 소리의 쾌감과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손꼽히게 적다. 노네임의 억양과 톤은 다른 래퍼와 비교했을 때 세거나 강하지 않아도, 촘촘히 구성한 라임과 리드미컬한 플로우 덕에 소리의 맛을 끌어올린다. 이번에도 긴 공백을 무시하듯 본래의 탁월한 스킬을 바탕으로 최상의 퍼포먼스를 들려준다. 과거에 인간이 해시계를 통해 시간을 표현하고 절기를 파악했던 것처럼 노네임은 [Sundial]로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확인한다. 하늘이 맑고 푸르를수록 시간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듯이 그는 더욱더 명료한 방식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시간을 분명히 드러낸다. 해시계는 정확히 새 걸작을 가리킨다.
1. JPEGMAFIA & Danny Brown - Scaring The Hoes
Released: 2023-03-24
결은 조금 다르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제이펙마피아(JPEGMAFIA)와 대니 브라운(Danny Brown)은 닮았다. 그런 둘이 함께 만든 [Scaring the Hoes]는 기대치를 웃도는 완성도의 작품이다. 제이펙마피아가 전곡을 책임진 프로덕션은 괴이하고 변칙적이며, 중독적이다. 엔싱크(N’SYNC)의 “Gone”과 켈리스(Kelis)의 “Milkshake” 같은 곡부터 1980년대 일본 광고 음악까지 다양한 소스를 샘플링하여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오묘한 자극을 더했다. 여기에 댄서블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적극적으로 차용되어 흥을 끌어올린다.
앨범에 활기를 더하는 건 대니의 랩이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톤의 제이펙마피아의 랩이 중심을 잡으면, 대니가 뛰어들어 한바탕 난장을 펼친다. “Steppa Pig”, “Run The Jewels”, “Where Ya Get Ya Coke From?” 등에서는 어지럽게 회오리치는 먹먹한 질감의 악기 속에 두 사람의 랩 또한 하나의 악기처럼 어우러지며 색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제이펙마피아와 대니의 태도는 사운드만큼이나 호전적이다. 기존 체제와 주류 힙합 씬을 거침없이 공격하고 조롱한다. ‘우선 일론 머스크는 엿이나 먹어, First off, fuck Elon Musk’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첫 트랙 “Lean Beef Patty”부터 앨범의 기조가 선명히 드러난다.
[Scaring the Hoes]에서 제이펙마피아와 대니는 에너지를 남김 없이 분출한다. 나름대로 일관된 주제를 끌고 갔던 개인 작품들을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펼쳐냈다. 마치 두 사람의 뇌 속을 구석구석 탐험하는 듯한 느낌이다. 상이한 장르와 소스를 한데 섞어서 급진적인 전개가 이어지는 제이펙마피아의 프로덕션은 일정 경지에 올랐다. 약 36분의 러닝타임 동안 광기의 소용돌이에 취해 몸을 흔들다 보면 이들에게 감화될 수밖에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미로 ‘미친’ 힙합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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