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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에 따라 심상이 바뀐 리메이크 곡들 - 국외 편
이경화 작성 | 2012-05-09 16:51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13 | 스크랩스크랩 | 30,728 View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김춘수의 ‘꽃’을 사랑한다. 글로만 남아 있을 때에는 그저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한 노랫말들은 연주와 보컬이 뒤섞이면서 생명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가사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실연자와 가수들에 의해 이 노랫말의 해석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89년 발표되어 수년간 천천히 입소문을 타면서 93년 가요계를 평정한 김수희의 “애모”는 한 여자의 사랑이 빚어낸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지만, 故 김수환 추기경이 방송에서 부르면서 훌륭한 CCM 송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당신은 나의 남자여’하는 마지막 구절을 ‘당신은 나의 친구여’라고 바꿔 부른 가사는 종교를 떠나 당시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곡의 심상이 바뀌는 사례는 우리가 듣고 열광하는 흑인음악 뮤지션과 관련한 곡 중에도 꽤 있다.

1. Radiohead와 Macy Gray의 Creep

92년 싱글로 발매 후, 이듬해 데뷔앨범인 [Pablo Honey]에 수록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Creep”은 짝사랑으로 인한 자학적인 가사류 중 갑으로 평가받는다. 라디오헤드 본인들에게는 다른 트랙에 비해 너무 큰 사랑을 받는 나머지 실제로 공연 세트리스트에서 빠지기도 하는 애증의 트랙이자 밴드 커리어 사상 최고의 트랙이다. “Creep”에서 드러나는 ‘너 짱, 나 병신’ 하는 가사는 국내에도 심심찮게 쓰이는 소재로 지독한 짝사랑에 대한 열병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사다. 박효신의 “동경”, 박승화의 “사랑해요”,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같은 곡들이 이러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스컬은 디지의 곡을 인용한 “쓰레기”라는 곡을 통해 “너는 천사다. 나는 아닌데” 하는 가사를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곡의 대부분은 이성을 향한 갈망으로 보이며 천사 같은 그녀를 외치는 톰 요크의 “Creep” 역시 마찬가지다.

올 초 알앤비 씬에서 잔뼈가 굵은 메이시 그레이(Macy Gray)의 커버 앨범 발매 소식이 전해지면서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429 Records’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한 앨범 발매가 그러했고, 메탈리카(Metallica), 라디오 헤드,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같은 록밴드의 곡을 커버했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이중 “Creep”은 그 원곡이 가지는 명성에 힘입어 많은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클래식 록 넘버인 점에서 메이시 그레이의 해석이 기대되었고 그 결과물은 메이시 그레이로 인해 전혀 다른 짝사랑의 트랙이 되었다. 보통 노래에 등장하는 그나 그녀는 화자에 따라 그녀와 그로 달리 불리지만, 메이시 그레이는 원곡의 가사에 변화를 주지 않고 그대로 불렀다. 지독한 짝사랑의 트랙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메이시 그레이가 부르면서 레즈비언의 짝사랑 트랙이 탄생한 셈이다. 메이시 그레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남자친구가 없는 여자는 세상 모든 남자가 라이벌이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는 그 남자 하나만 이기면 돼. 그러니깐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를 꼬셔야 해’하는 우스갯소리를 생각해본다면 메이시 그레이를 ‘Creep’으로 만든 그녀는 메이시에게 분명 큰 골칫거리가 아닐까?

메이시 그레이 이전에도 “Creep”을 리메이크한 여성 보컬은 몇몇 있었다. 카렌 소자(Karen Souza)의 경우 ‘She’s Running Out’ 구절을 아예 삭제시킨 후 불렀으며, 엘리자 럼리(Eliza Lumley)는 메이시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가사의 변함없이 구성만 변경시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2. Kate Bush와 Maxwell의 This Woman’s Work

1988년 케빈 베이컨(Kevin Bacon)이 주연한 영화 [결혼의 조건] (원제: She’s Having A Baby)에 수록된 케이트 부쉬(Kate Bush)의 “This Woman’s Work”다. 맥스웰(Maxwell)이 MTV 언플러그드에서 라이브로 부른 후 다음 정규 앨범인 [Now]에 수록하기도 했다. 여성인 케이트 부쉬가 아이의 출산 과정에서 산모와 아이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관점으로 노래한 원곡을 맥스웰이 재해석하며 새롭게 탄생했다. 그래서 그럴까? 원곡에서 소리치는 여성의 코러스 라인은 산통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케이트 부쉬의 뮤직비디오와 맥스웰의 라이브, 뮤직비디오 모두 추천이다.

아버지의 말 못 할 고통을 노래하는 관점인지라 여성인 케이트 부쉬보다는 남성인 맥스웰의 곡이 감정이입하기엔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케이트 부쉬의 버전은 어딘가 모르게 “니들이 우리의 고통을 알아?” 하는 느낌이 든 달까. 그나저나 맥스웰은 3부작으로 알려진 [Blacksummers’night]의 첫 번째 작품만 발표 후, 또 다시 감감무소식이다. 보고 있나 맥스웰? 레이디 가가, 라디오 헤드를 비롯한 유수의 뮤지션들이 내한 공연을 하는 올해 맥스웰의 내한이 이루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한국 와서 커피 광고도 좀 찍고. 응?

3. Prince와 Sinead O’connor의 Nothing Compares 2 U

프린스(Prince)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보다 좋은 이유 한 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나는 이 곡의 원작자가 프린스라는 점을 들겠다. 1984년 작사, 작곡되었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시네드 오코너(Sinead O’connor)가 스튜디오 레코딩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처음에는 프린스가 그의 모친을 위해 만들어진 트랙으로 알려졌지만, 훗날 밝혀진 이야기로는 그의 애간장을 태웠던 수잔나 멜보인(Susannah Melvoin)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트랙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진다. 이 트랙 외에 프린스의 많은 러브송들이 수잔나 멜보인에게 바치는 트랙으로 밝혀졌으니 키 157cm로 루저들의 영웅인 프린스에게도 넘지 못한 벽이 있었던 걸까? 프린스의 명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수잔나 멜보인에게 자연스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랑이 떠난 지 15일 하고 7시간째의 시점을 노래한 이 곡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시네드 오코너가 부르면서 그 슬픔은 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TV 다큐멘터리 ‘사랑 - 진실이 엄마’ 편에 재즈 뮤지션 지미 스캇(Jimmy Scott)의 버전이 방송을 타며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로드 스튜어트와 메리제이 블라이즈가 듀엣한 라이브 영상 역시 감동적이니 찾아보길 바란다. 호피 무늬 옷을 입은 채 개다리춤을 추는 로드 옹을 만날 볼 수 있다!

도입부의 가사 부분에서 프린스는 13일 7시간, 시네드 오코너는 15일 7시간을 노래하는 등 버전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니 비교해가며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4. Michael Jackson과 R. Kelly의 You Are Not Alone

지금이야 국내외를 막론하고 핫샷 데뷔와 동시에 차트를 휩쓰는 것이 익숙하지만, 마이클 잭슨이 이 곡을 싱글 발매 했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사상 최초로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You Are Not Alone”의 작곡자는 알앤비 킹 알 켈리(R. Kelly)다. 이전까지 함께했던 작업물이 없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려진 바로는 알 켈리가 이 곡의 데모를 보낼 때 마이클을 성대모사하며 레코딩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퀸시 존스(Quincy Jones), 테디 라일리(Teddy Riley) 같은 명 프로듀서들과 작업하던 팝의 황제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알 켈리의 곡을 취입하며 [History]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동생인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듀엣하며 당시 최고가였던 700만 달러를 들여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첫 번째 싱글 “Scream”의 차트 5위라는 다소 부진했던 성적을 말끔히 해소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부인이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와 함께 세미누드로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아동 성추행 사건을 비롯하여 개인적으로 고난을 겪었던 시절 발매된 트랙은 곡의 가사와 맞물려 많은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009년 6월 25일 마이클이 생을 달리한 후 1년 반이 지난 2010년, 이 곡의 원작자인 알 켈리는 그의 정규앨범 [Love Letter]의 보너스 트랙을 통해 마이클을 기리며 자신만의 “You Are Not Alone”를 수록했다. 원작자임에도 마이클 잭슨의 보컬 해석에는 미치지 못한 트랙이지만, 마이클을 향한 알 켈리의 존경과 애정이 느껴지는 트랙임은 분명하다. 마이클 잭슨의 버전이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느낌이라면, 알 켈리의 버전은 천상에서 노래하고 있을 마이클에게 선사하는 느낌이다.

“You Are Not Alone”이라는 제목은 국내에서 잘못된 행태의 보도를 일삼는 언론을 빗대어 “너는 언론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개그 소재에 쓰이기도 했다.

5. Without You의 저주 속 리메이크들

해리 닐슨(Harry Nilsson),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로 대표되는 “Without You”의 원작자는 영국의 4인조 밴드 배드핑거(Bad Finger)였다. 결성 당시 제2의 비틀즈(Beatles) 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비틀즈 아류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울한 커리어를 보내야 했다. 이들의 두 번째 앨범인 [No Dice]에 수록된 “Without You”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채 이듬해 해리 닐슨에게 헐값에 곡의 판권을 넘겨준다. 그리고 해리 닐슨이 발표한 “Without You”는 원곡의 인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빌보드 차트에서 4주 연속 1위를 하며 성공적인 리메이크 곡의 대표로 남게 된다.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 들었을까? 배드핑거에서 “Without You”를 만들었던 두 멤버 피터 햄(Pete Ham)과 톰 에반스(Tom Evans)는 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Without You”의 원곡을 해리 닐슨 버전으로 알고 있으니 원작자는 얼마나 억울할지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쨌든 해리 닐슨은 가수와 작곡가의 커리어는 이어가지만, “Without You”를 능가하는 히트곡 배출에는 실패하고 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이 맘 때쯤부터 “Without You”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호주 출신의 듀오 에어 서플라이 역시 “Without You”를 취입 후 인기가 떨어졌으며,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기록한 머라이어 캐리 역시 후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언론 보도가 흘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Without You” 속에 배드핑거의 저주가 들어가 있다고 맹신하는 많은 이들이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말을 붙이며 그럴싸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이러한 “Without You”의 리메이크로 인해 일어난 이야기들은 픽션이 가미된 채 국내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저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트랙이라는 생각이다. 최근에 “Without You”를 리메이크한 유명인으로는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의 클레이 에이킨(Clay Aiken)이 있지만, 발표 후 게이임을 커밍아웃 후 소녀팬들이 좀 떨어져 나간 것 말고는 별다른 저주는 없어 보인다.

“Without You”의 경우 가사 해석의 변화가 아닌 곡 스타일의 변경이 많았던 곡이다. 록스타일이던 원곡에서 해리 닐슨은 발라드로 해석했으며, 머라이어 캐리는 알앤비 창법을 가미하여 원곡과는 전혀 다른 곡을 탄생시켰다.

6. Bob Dylan과 Wyclef Jean의 Knockin’ On Heaven’s Door

1973년 발표되어 빌보드 차트 12위까지 랭크된 고전 중의 고전인 밥 딜런(Bob Dylan)의 “Knockin’ On Heaven’s Door”는 많은 시대적 영웅들이 한 번씩 리메이크 할 정도로 뛰어난 곡이다. 사형집행관의 고난을 노래했다는 이야기와 월남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반전을 노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우 같은 밥 딜런은 자신의 노랫말에 대한 명확한 해설을 내놓지 않는 뮤지션으로 유명하다. 보통 후자로 많이 해석되곤 한다. 지구 상의 모든 군인이 이 곡을 사랑한다면 전쟁이 멈출까 하는 망상을 한 번씩 해보곤 한다.

엑슬로즈(Axl Rose)의 샤우팅과 슬래쉬(Slash)의 기타 솔로가 돋보이는 건스앤 로지스(GunsN’Roses)의 리메이크 버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 U2 같은 뛰어난 뮤지션들 역시 이 곡을 커버했다. 알앤비, 힙합 뮤지션 중에는 동안으로 유명한 베이비 페이스(Baby Face)가 커버 한 바 있다. 그룹 퓨지스(Fugees) 출신의 와이클레프 진(Wyclef Jean) 역시 자신의 솔로 앨범에 이 유명한 고전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는데, 투팍(2Pac), 비기(Notorious B.I.G), 알리야(Aaliyah), 빅펀(Big Pun) 같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많은 뮤지션을 추모하며 또 다른 의미의 반전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곡의 특성 때문인지 보통 여성 보컬보다는 남성 보컬에 의해 많이 리메이크 되곤 하지만, 에이브릴 라빈을 비롯한 여성들의 커버도 존재한다. 재즈 보컬인 세릴 포터(Cheryl Porter) 역시 자신의 앨범에 소울풀한 창법으로 이 곡을 싣기도 했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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