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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국 힙합의 발자취 2부
리드머 작성 | 2009-10-15 20:29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3 | 스크랩스크랩 | 29,142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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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 힙합의 역사와 차트를 지배하는 블랙 뮤직의 상황

20여 년 전의 미국 마이너리티들을 대변하던 문화가 오늘날 어떻게 해서 세계와 한국 젊은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힙합 음악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힙합만의 독특한 음악적 형식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다른 음악들과 구별되는 힙합 고유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디제이(DJ)와 엠씨(MC), 비트(Beat)와 라임(Rhyme)

힙합 음악을 타 장르와 비교함에 있어 가장 차별되는 점을 꼽으라면 랩(Rap)이라는 메시지 전달 수단과, 일정 마디가 계속 반복되면서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브레이크 비트(Break Beat)라는 형식적 수단, 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힙합이란 용어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어쨌든 랩과 비트,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바로 ‘리듬’에 있기 때문이다.

1) 디제잉(DJing)과 브레이크 비트

70년대 초중반 미국의 클럽이나 파티에서는 주로 디스코 음악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자메이카 출신의 쿨 디제이 허크(Kool DJ Herc)는 자신이 틀어주던 레게(Raegge) 음악이 그다지 반응을 얻지 못하자 당시 미국의 주류 흑인 음악이었던 알앤비(R&B)나 훵크(Funk) 음악을 틀어주면서 곡의 간주(Break) 부분을 반복시키는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는 곡 중간의 가사가 없는 부분의 일정 마디만을 계속 거듭해 플레이시킴으로써 곡 전체의 기승전결의 구성에서 벗어난 단순하고 반복적인 비트가 극도의 리듬감을 생성해냈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샘플링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브레이크 비트는 초기 힙합의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반주)적인 형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단순한 루프(Loop)의 반복으로 전체의 곡을 구성하는 힙합의 음악적 형태 때문에 오히려 생동감 있는 리듬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초의 랩 싱글로 평가받는 슈거힐 갱(Sugahill Gang)의 'Rapper's Delight(*정확하게는 최초로 레코딩된 랩 싱글이다)'이다. 훵크 그룹 쉭(Chic)의 'Good Times'의 브레이크 비트를 고스란히 가져와 루핑시키고 그 외의 잡다한 소스들을 첨가하여 흥을 더한 이 트랙은 초기 힙합 비트의 형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 디제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한 곡의 간주 부분만을 반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2개 이상의 레코드 덱(Record Deck)을 이용해 여러 곡의 주요 부분을 짧게 믹스해 틀어주는 한편 재빨리 음반을 바꾸어 가면서 쇼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후엔 디지털 샘플러(*특정 소스로부터 소리를 따와서 그것을 재생하거나 반복시킬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음원의 디지털 저장과 환원이 가능해짐에 따라 샘플링을 활용한 브레이크 비트의 재해석과 재창조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힙합 비트의 음악적 완성 역시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컷 앤 믹스나 컷 앤 페이스트 같은 사운드 콜라쥬 형태의 비트 메이킹의 대중화는 샘플의 무단 도용에 대한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샘플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힙합 음악의 태생적인 한계와 짝을 이루는 그 탄생에 대한 동경은 샘플링을 통한 작법의 유효함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한편, 초기에는 주로 훵크와 알앤비 음악의 소스들을 사용하던 샘플링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쳐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가 레게와 힙합 비트를 접목시키고 데 라 소울(De La Soul), 갱스타(Gang starr)등이 재즈(Jazz)를 샘플링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그 음악적인 영역을 더욱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샘플링을 통한 힙합 음악의 크로스오버적이고 하이브리드한 면모는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퍼프 대디(Puff Daddy)나 와이클레프 장(Wyclef Jean)이 시도한 록(Rock)과 클래식(Classic)의 샘플링, 더불어 일찍이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가 시도하였고 팀발랜드(Timbaland)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와의 결합이 현대적으로 재현되면서 그 음악적 영역의 한계를 넓혀갔고, 이에 따라 힙합은 모든 장르의 음악과 교배가 가능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는 팀발랜드식 샘플링을 되도록 지양하는 비트 메이킹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근래 들어 스캇 스토치(Scott Storch)나 스위즈 비츠(Swizz Beatz) 등에 의해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2) 엠씨잉(MCing)과 라임(Rhyme)

랩의 시작에 대해서는 사실상 정확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여러 흑인 음악 매체는 디제이 쿨 허크가 파티에서 브레이크 비트를 틀어주고 큰 호응을 얻자 무대의 생동감과 흥분을 더하기 위해 마이크를 통해 거리의 슬랭(Slang)들을 외쳤던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캡 칼로웨이-Cab Calloway-의 'Minnie the Moocher'라는 곡은 랩의 모태가 되었던 곡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종의 여흥구이자 쇼의 진행 멘트였던 랩은 디제이들이 복잡해지고 다양화된 턴테이블 스킬로 인해 쇼의 진행을 전문적으로 맡는 엠씨(MC)를 고용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 같은 팀이 브롱스를 중심으로 점차 늘어감에 따라 지금의 디제이와 엠씨(혹은 랩퍼)의 구도가 갖춰지게 된 것이다. 이후 엠씨들은 점차 자신들의 멘트를 음악에 걸맞게 하기 위해 효과적인 발음법을 개발하며 랩이 가지는 리듬의 영역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이용된 것이 바로 각운, 즉 라임(Rhyme)이다. 이처럼 기존 엠씨들의 구술적이고 자유로운 메시지에 라임을 통한 리듬의 요소가 결합하면서 랩은 점차 음악적인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또한 진화했다.

그럼 여기서 공식적인 최초의 랩 음악으로 거론되는 슈거힐 갱의 의 가사를 잠깐 살펴보자. 보시다시피 여흥구와 간단한 라임이 어우러지며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 said a hip hop the hippie the hippie
to the hip hip hop, a you dont stop the rock it
to the bang bang boogie, say up jumped the boogie
to the rhythm of the boogie, the beat..."

이후 랩의 메시지는 파티에만 고립되지 않고 점차 사회와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렇게 랩의 기술(Skill)이 점차 분화되고 발달하자 랩퍼들 간에 경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이 랩 배틀(Rap Battle), 혹은 프리스타일 배틀(Freestyle Battle)이라 불리는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힙합 문화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랩 배틀은 특정 주제를 라임이라는 룰 안에서 누가 얼마나 더 재치 있고 순발력 있게 표현하는가를 겨루는 것으로 주위 청자들의 호응도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이러한 프리스타일 랩 배틀은 랩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징인 메시지의 전달과 라임을 통한 형식미, 그리고 청자들과 즉시 호흡하는 라이브의 묘미를 두루 갖춤으로써 랩의 시작과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고급의 언어유희적 게임이 되었다. 이것은 엠씨 주변의 상황이나 생각을 아무런 제약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힙합 음악의 메시지가 주제의 한계나 표현의 장애가 없음을 떠올리게 하는 결정적인 힌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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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랩에 대한 가장 흔한 오류가 바로 ‘랩의 가사는 선동적이고 반항적이다.’ 혹은 ‘랩에는 욕설이 난무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랩 가사의 대표적인 부분은 될 수 있을지언정 랩 가사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랩의 시작은 파티에서 비롯되었다. 그랜드 마스터 플레시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 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 이후 랩 가사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아프리카 밤바타를 거쳐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에 이르러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메시지의 가사로 진보하게 된다. 또한 이후엔 데 라 소울이나 탈립 콸리(Talib Kweli), 커먼(Common) 등으로 대표되는 엠씨들의 다소 이상주의적 성향의 가사도 등장하게 된다. 한편, 랩의 가사와 라임의 형식미를 예술적 범주로 편입시킨 장본인은 라킴(Rakim)인데 그는 직설적인 화법에 의존하던 랩의 메시지를 은유와 비유를 통해 문학적으로 강조했으며 라임과 플로우(Flow)에 있어서도 모음을 주로 이용하던 당시의 수준을 뛰어넘어 기술적으로 한 단계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와 나스(Nas) 같은 후배 랩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Just when things seemed the same, and the whole scene is lame
I come and reign with the unexplained for the brains till things change
They strain to slang sling, I'm trained to bring game...”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고 그 모든 광경들이 절룩거릴 때, 나는 천재들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지니고 와서 이 모든 것들이 변화할 때까지 군림한다. 그들은 비속어의 끈을 잡아당기고 나는 즐거움을 가져오도록 다듬어졌지(그들은 비속어만 내뱉고 있지만 나는 -랩의 순수한-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지)...”

1997년 발매된 라킴의 솔로 데뷔 앨범 [The 18th Letter]의 동명 타이틀곡은 당시 하드코어/갱스터의 과격한 메시지가 전성기를 누리던 힙합 씬 속에서 빛나는 라임과 멋진 은유적 표현의 가사로 많은 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 앨범에서 라킴은 10여 년 전 자신이 선포했던 새로운 라임의 패러다임을 진일보한 메시지와 언어적 유희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이렇듯 랩은 많은 선구자들을 통해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발전해왔으며 근래 들어서는 랩 음악만으로도 장르적 카테고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메시지와 스타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랩에 대한 섣부른 편견이나 접근은 자칫 힙합 문화 전반에 대한 크나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2) 랩/힙합 음악의 탄생과 성장

1) 랩/힙합의 탄생

근래 들어서야 랩/힙합을 비롯해 알앤비(R&B)와 소울(Soul)에 이르는 흑인 음악들이 빌보드 차트를 지배하면서 완전히 주류 음악으로서의 위치를 굳혔지만 랩/힙합 음악 역시 그 탄생의 시기에는 주로 한때의 작은 유행이나 수많은 대안적 음악 중의 하나에 다름없었다. 랩의 탄생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는데, 뉴욕 브롱스의 흑인들이 벌여왔던 블록 파티(Block Party)에서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가 짧은 시간동안 곡의 주요 부분만을 짧게 믹스한 음악을 틀면서 흑인 고유의 슬랭을 여흥구로 외쳤던 것의 랩의 시초가 되었다. 바로 그 여흥구가 파티에 참여한 대중들의 좋은 반응을 얻자 디제이들이 믹싱에 집중하기 위해 랩을 하는 엠씨(MC)를 따로 고용하면서 디제이와 엠씨의 기본 구성을 갖추게 되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기술적인 발전을 이룸에 따라 오늘날의 랩 음악이 등장하게 되었다.

랩 음악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세계의 대중들 앞에 등장한 것은 슈거힐 갱(Sugahill Gang)이 79년 발표한 싱글 'Rapper's Delight'을 통해서다. 최초의 녹음된 랩/힙합 싱글이었던 이 곡은 간결하고 신나는 리듬에 다양한 소스를 첨가한 전형적인 힙합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6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어 등장한 그랜드매스터 플래쉬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Furious Five)가 1982년 발표한 'The Message'는 랩 음악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곡이다. 그동안의 흑인 음악이 취해왔던 저항이 다소 역설적인 방법이었다면 이 곡은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후일 힙합의 중요한 매력으로 승화되는 직설화법으로 무장한 “하드코어 랩(Hard Core Rap)”의 탄생에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는[Planet Rock](1982) 앨범을 통해 테크노와 힙합 리듬을 결합하며 사운드 스케이프의 확장과 다양한 장르와의 실험적 교배로 힙합이 가지는 음악적 잠재력의 한계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얻었다.

2) 힙합 음악의 과도기-올드 스쿨에서 뉴 스쿨로의 발전 진행 양상

이후 랩과 비트는 점차 기술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80년대 미국 흑인 사회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황폐화되자 랩은 흑인 사회의 목소리 역할의 수단으로 발전하는데, 이런 흑인 사회의 대변자 역할과 동시에 대중음악적 상품으로서의 가능성까지 검증받은 것은 런 디엠씨(Run-D.M.C.)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랩/록 크로스오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데 특히 1986년 발매한 [Raising Hell] 앨범에선 인기 록 그룹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협연한 'Walk This Way'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최초로 멀티 플레티넘을 달성한 랩 앨범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의 사운드는 록 음악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기에 독창적인 힙합 음악을 완성해낸 그룹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랩 음악이 나름의 형식과 구성의 완전한 완성을 이룬 것은 이후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와 에릭 비 앤 라킴(Eric B. And Rakim),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등에 의해서였다.

에릭 비 앤 라킴은 기술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비트와 라킴의 랩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가사의 구술과는 별개로 자음과 모음을 보다 기술적으로 활용하며 랩 자체에 리듬감을 부여한 입체적인 개념의 라임(Rhyme)은 후대의 랩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의 래퍼 케이알에스 원(KRS-One)은 거리의 문화들을 나름대로 집대성하며 철학으로 승화시켰는데 그가 정의한 거리의 철학은 훗날 갱스터 랩(Gangster Rap)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이러한 하드코어 랩의 완성은 퍼블릭 에너미의 정치적인 랩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1988년 발표한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그 자체가 바로 하드코어 힙합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정치적인 메시지와 강렬한 사운드는 비단 흑인들뿐만 아니라 백인 저소득층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백인 그룹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는 랩과 록의 양쪽 팬들로부터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1986)은 랩 앨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챠트 1위로 데뷔하며 7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는데 힙합 비트와 록과 훵크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이후 팝, 재즈에 이르는 방대한 음악적 스케일에 걸맞는 탁월한 조화를 선보이며 힙합 음악의 하이브리드한 면모를 극단적으로 대변했던 그들의 캐릭터는 산업적/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3)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의 부상

퍼블릭 에너미와 뉴욕의 힙합씬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걸쳐 약간의 침체기에 놓여 있을 때 대중 음악계에서 맹위를 떨치던 것은 엠씨 해머(MC Hammer)를 위시한 댄스/랩 계열의 래퍼들이었다. 특히 엠씨 해머는 80년대 후반 뉴욕 하드코어 랩의 부진과 90년대 초반 팝계에 전면으로 급부상할 서부 갱스터 랩의 공백기에서 앨범 [Please Hammer Don't Hurt Em](1990)을 통해 천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랩이라는 음악 장르를 전 세계로 알렸다. 디제이 재지 제프 앤 프레시 프린스(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나 톤 록(Tone Loc) 또한 싱글차트와 앨범차트를 누비며 나름대로 랩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지만 이들 모두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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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퍼블릭 에너미가 강력한 어조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던 무렵 미국의 정반대편 LA에서 등장한 N.W.A.는 파괴적이고 향락적인 무법자의 이미지로 대중 음악계에 또 다른 파장을 몰고 왔다. 이들은 케이알에스 원과 아이스 티(Ice-T)가 먼저 정립해놓았던 게토(Ghetto)와 갱스터의 이미지 위에 폭력과 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미화를 더해 거리의 삶을 찬양하는 갱스터 랩의 전형적인 양식을 확립한다. N.W.A.의 일원이었던 닥터 드레는 92년 지-훵크(G-Funk)h라는 독자적이고 충격적인 사운드로 무장된 [Chronic]을 발표해 그해 빌보드 차트에 8개월간이나 10권내에 머물렀고 4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갱스터 랩의 전성기를 선포했다. 이듬해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의 데뷔 앨범[Doggystyle]이 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뒤이어 워렌 지(Warren G)와 독 파운드(Dogg Pound)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갱스터 랩의 위상은 끝없이 치솟았다. 폭력과 마약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여성 비하 등의 이유로 받던 많은 비판과는 대조적으로 하늘을 찌르던 갱스터 랩의 인기는 투팍(2Pac)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특히 랩 음악 사상 최초의 더블 앨범이었던 [All Eyez On Me(1996)]의 엄청난 성공은 이전부터 갱단과 관련된 사건에 잇따라 연루되었던 과거를 배경으로 갱스터라는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진실성을 확보한 결과이자 그 성공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투팍이 의문의 총격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갱스터 랩도 차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투팍이 죽은 후에도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메시지는 많은 흑인 청년들의 공감과 존경을 얻어내며 많은 게토의 청년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90년대 후반의 주류 힙합씬

투팍과 노터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한 갱스터 랩의 퇴조 이후 씬의 전면에 나선 것은 푸지스(Fugees)와 퍼프 대디(Puff Daddy)가 주도한 팝-랩이었다. 96년 푸지스는 [The Score] 앨범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그 전면에는 와이클레프 장(Wycelf Jean)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에 보태 로린 힐(Lauryn Hill)의 스타적인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듬해에는 노터리어스 비아이지의 추모곡 'I'll Be Missing You'으로 탁월한 팝적 감각을 뽐냈던 퍼프 대디가 데뷔 앨범[No Way Out(1997)]을 내놓고 97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많은 뮤지션들이 등장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는데 빠르고 멜로디컬한 랩으로 주목받았던 클리블랜드 출신 본 떡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를 비롯해 노터리어스 비아이지 사망 이후 뉴욕 힙합의 맹주로 추앙 받는 나스(Nas)나 제이 지(Jay-Z)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5) 2000년대 힙합 음악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기까지 힙합 씬의 가장 큰 화두는 “언더그라운드(Under Ground)힙합”이었다. 모스 데프(Mos Def)와 탈립 콸리(Talib Kweli)는 그들의 듀오 앨범 [Black Star]와 각각의 솔로 앨범을 통해 새천년 힙합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패로아 먼치(Pharoah Monch)를 비롯한 수많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대중적으로 주목받았다. 한편 주류 힙합 씬에서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팀발랜드와 넵튠스, 스위즈 비츠 등의 여전한 득세와 퍼프 대디의 몰락, 그리고 백인 래퍼 에미넴(Eminem)을 앞세운 닥터 드레의 재입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96년 자신의 레이블 애프터매스(Aftermath)를 설립한 닥터 드레는 에미넴과 자신의 복귀 앨범, 그리고 50 센트(50 cent)의 앨범을 연달아 크게 성공시키며 독특한 소울 샘플링으로 인기를 얻은 신예 프로듀서/랩퍼 칸예 웨스트(Kanye West)를 발굴해낸 제이 지의 락카펠라(Roc-a-Fella) 레이블과 함께 주류 힙합 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등극하였다.

3부에서 계속

※참고

최초로 힙합(Hip Hop)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뮤지션은 불분명한데 대개 디제이 할리우드(DJ Hollywood) 또는 그랜드 매스터 플래시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 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에서 활동했던 고(故) 카우보이(Cowboy)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당시의 광고 전단지 등에선 힙합 뮤지션으로 소개되기보다는 디스코 계열의 뮤지션으로 분류되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어떤 곡의 소스나 곡의 일부를 잘라내서 새로운 곡의 소스로 결합시키는 샘플링의 기법. 예로써 디제이 프리미어가 프로듀스한 나스(Nas)의 'Memory Lane'은 루벤 윌슨의 'We're In Love'를 샘플로 해서 컷 앤 페이스트 기법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기존 곡의 익숙한 매력과 재창조의 신선한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1987년 에릭 비 앤 라킴(Eric B. & Rakim)의 데뷔 앨범 [Paid In Full]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샘플을 무단 사용해 법적 제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얼마 전에는 1997년 사망한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의 1994년 발매된 데뷔 앨범 [Ready To Die]가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의 곡을 무단 도용한 것이 인정되어 내쉬빌 법정에서 판매 금지 처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실 랩에서 플로우(flow)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랩을 할 때 리듬을 타면서 형성되는 일정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래퍼마다 라임을 배치하는 것이 다르고 랩을 할 때의 억양과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플로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얼마나 라임을 잘 살리면서 리듬을 잘 타는가에 따라 플로우가 좋냐 나쁘냐가 갈린다.

음악과 춤이 함께 했던 동네에서 여는 파티나 콘서트. 블록 파티는 7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역적으로 파티의 색깔이 달랐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이 살던 지역에서는 길의 일정 구역을 막아 놓은 상태에서 DJ들의 음악과 함께 파티가 열렸는데, 대부분 불법적으로 진행이 되었던 반면, 도시 주변의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노동절과 같은 특정 공휴일에 블록 파티가 열렸는데, 저소득층 구역에서 열리던 파티와는 달리 바비큐를 구워먹거나 Simon Says(제스처 게임의 일종으로 사이몬 역이 명령하는 동작을 모두가 따라하는 게임) 등을 하며 다소 얌전(?)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팀의 리더였던 척 디는 1992년 10월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문화 엘리트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원래 비스티 보이즈는 훵크 밴드로 결성되었으며 영국의 음악 잡지『스핀』에서 선정한 100대 앨범에 선정된 그들의 데뷔 앨범은 헤비메탈과 랩의 절묘한 조화라고 평하고 있다.

닥터 드레(Dr.Dre)가 창조한 갱스터 훵크(Gangsta Funk)의 준말로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추구했던 피 훵크(P-Funk)에서 이름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두터운 베이스와 피 훵크를 비롯한 올드 소울과 훵크 음악에서 따온 샘플링을 바탕으로 한 멜로딕하고 느긋한 분위기의 g-Funk는 드럼과 베이스만이 강조되던 힙합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웨스트코스트(Westcoast)지역 스타일의 힙합음악이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김봉현, 염정봉, 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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