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머

주메뉴

최근 공지사항 및 SNS 링크

통합검색
  • Twitter
  • Facebook
  • Youtube
  • 통합검색

컨텐츠

Feature

  1. Home
  2. Feature
  3. 리드머 토픽
[특집기사] R.I.P God Father Of Soul, James Brown
오이 작성 | 2009-10-27 17:55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1 | 스크랩스크랩 | 21,791 View

1323109450.jpg
※James Brown
추모 특집 기사

2006년 12월 28일 아폴로(Apollo)극장은 마지막으로 그를 무대에 세웠다.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동고동락해온 아폴로 극장으로서는 그의 손을 쉽게 놓아줄 수 없었으리라. 제임스 브라운의 인생에서도 흑인들에게도 의미 깊었던 이날 아폴로극장의 풍경은 인종을 초월한 수많은 팬이 장사진을 이루며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그의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나이 제임스 브라운을 팬들은 그렇게 보냈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적 성과

흔히 ‘Godfather of Soul’, ‘Mr. Dynamite’라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던 제임스 브라운. 그의 업적에 대해 새삼 구구절절 말로 풀어놓은 것보다 그의 수혜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수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은 충분히 가늠되고도 남는다. 자극적이고 역동적인 리듬과 쉴 틈 없이 변주되는 사운드, 피 끓는 듯한 절규의 보컬,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발놀림과 브레이크 댄스의 시초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 오두방정하기 그지없는 발동작은 많은 이의 뇌리에 깊숙이 침투했다. 또한, 훵크 이전의 훵크를 했던 창시자답게 가스펠을 기초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물적인 리듬은 아프로-아메리칸이 갖는 특수한 민족성을 드러내며 각종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제임스 브라운식 리듬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씬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믹 재거(Mick Jagger)나 데이빗 보위(David Bowie)등이 그의 음악에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함은 물론이요, 이번 NME(영국의 락 전문잡지)의 커버를 제임스 브라운이 장식한 것만 보아도 그의 음악이 단지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2003년 인터뷰에서 ‘디스코가 제임스 브라운이고, 힙합이 제임스 브라운이고, 랩이 제임스 브라운이지. 이게 무슨 말이냐고? 당신이 듣는 래퍼들의 음악에 90%가 바로 나니까!’라고 말하는 이 노친네의 언행이 얄밉지 않은 것은, 그것이 바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첫 싱글 ‘Please, Please, Please’로 알앤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세상에 등장한 그는 ‘Try Me’, 'Night Train'을 비롯해 본격적인 제임스 브라운 훵크의 전형을 이룬 ‘Papa's Got a Brand New Bag’, ‘I Got You (I Feel Good)’등이 알앤비 차트에서 뿐만 아니라 종합차트에도 높은 순위로 등극하며 슈퍼스타의 입지를 굳힌다. 흑인들의 타고난 리듬은 민족성이 주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탁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민족마다 그 민족이 끄집어 낼 수 있는 리듬과 감각은 근원이 다르기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치들의 선천적인 리듬이 부럽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브라스면 브라스, 기타면 기타, 베이스면 베이스. 각종 악기들을 먹기 좋게 리듬파트로 구현시킨 제임스 브라운의 천재적인 감각은 지금 들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는 단지 흑인이기에 드러난 감각이 아닌, 제임스 브라운이기에 가능한 사운드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음악은 메이시오 파커(Maceo Parker), 피 위 엘리스(Pee Wee Ellis), 부시 콜린스(Bootsy Collins)등 그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훌륭한 세션들의 탁월한 감각이 덧입혀져 시대를 초월하는 사운드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1280830574.jpg


1963년, 그의 음악 활동에 첫번째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는 [Live At The Apollo]가 발표된다. 음악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앨범은 뉴욕 할램가에 위치한 아폴로 극장에서 이루어진 실황을 그대로 옮겨와 그동안 뮤지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제작된 여타 앨범들과는 달리 무대에서 이루어진 라이브의 생생함을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킹 레코드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자비를 들여 만들 정도로 자부심이 한껏 발휘된 이 앨범은 거칠 것 없는 목소리와 절규에 가까운 소울 창법,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그 당시 그의 인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비명에 가까운 여성들의 환호성까지, 스튜디오 앨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그의 땀 냄새가 그대로 녹음되어 현장감을 더하였다.

‘Papa's Got a Brand New Bag’, "Mother Popcorn (You Got To Have A Mother For Me)’, It's A Man's Man's Man's World'등을 비롯해 그의 대표곡인 ‘Get Up (I Feel Like Being Like A) Sex Machine’, ‘I Got You (I Feel Good)"등 정력적인 창작욕구가 불러낸 연이은 히트는 앨범과 싱글을 발표 할 때마다 논란과 인기를  얻게 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Godfather of Soul’로 불리게 된 것은 비단 천재의 음악에 대한 전율만은 아니었다. 반복적이고 조직적인 리듬과 욕망이 꿈틀거리는 자극적인 그의 음악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의 혼이 담겨 있었으며 향락적이지만 분노가 있고, 울분을 터트리지만 위로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흑인으로서의 입장을 정확히 확립한 앨범이 1968년에 발표된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이다.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1968년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앨범이 발표하기 전 흑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졌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암살당한 것이다. 정신적인 지주를 잃은 흑인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킹목사의 죽음에 충격 받은 흑인들은 크고 작은 폭동이 일으켰고, 다음날 보스턴에서 공연이 있었던 제임스 브라운은 시장의 반대를 무릎 쓰고 킹목사의 추모를 겸한 공연을 강행, 1만이 넘는 관중 앞에 섰다. 킹 목사의 비폭력 메시지를 전한 이날 공연은 TV방송을 타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폭동을 자중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모습이 정부의 호감을 불러일으켜 백악관등에 초청되어 정치인들과 교류를 갖게 되는데, 당시 베트남 전쟁 중이던 미국사회는 반전운동으로 인해 포화상태였다. 그런데 킹목사의 메시지를 대신했던 제임스 브라운은 베트남을 방문, 위문공연을 가는가 하면 'America Is My Home'란 곡을 발표해 흑인들과 반전 운동가들에게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사실 흑인들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 불러온 무참한 학살을 떠나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킹목사가 주장했던 것처럼 정의가 제대로 서 있지 않은 미국 땅에서 억압받았던 흑인 병사들이 세계의 정의를 위해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던 것이다(물론 전장에서도 흑과 백은 구분되어있었다). 그러니 제임스 브라운의 베트남 위문 공연은 논란을 야기하기 충분했으며, 그간 그의 행적을 빗대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제임스 브라운은 1970년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를 발표해 자신이 흑인들편에 서 있음을 각인시킨다. 어린 흑인 성가대원들과 함께 외치는 ‘외치자! 나는 흑인이며, 자랑스럽다고!’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흑인들을 열광시켰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앨범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간 흑인사회에서 소외될 뻔했던 제임스 브라운이 흑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되찾게 되는 앨범이 된 것이다.


1354734367.jpg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강제 이주해오면서부터 흑인사회는 한편으로 서냐, 서지 않느냐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권이 삶의 생존권이자 흑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제임스 브라운이 전성기를 누렸던 60, 70년대에도 정치를 배제하고 사랑타령으로 일관하던 흑인뮤지션들도 있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흑인사회의 모순과 그들의 응어리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던 그에게 이는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남길 뻔한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그가 뮤지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내보였다고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제임스 브라운은 뮤지션이기 이전에 흑인이었고, 흑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 아니었던가.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의 비통함과 강한 자기애,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부르조아지적 삶을 향유하고 싶은 욕구가 그 안에 내재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고 유지했던 그의 음악처럼 제임스 브라운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자신감을 되찾았으며 흑인들 앞에서 ‘I'm Black and I'm Proud’를 당당히 외침으로서 그들의 지지를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멈추지 않는 전설

2006년 12월 25일,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그의 인생은 음악과 분리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자신이 바로 소울이었고, 훵크였다. 불행한 어린 시절과 음악을 시작하면서도 끊임없이 불거져 나온 폭력과 강간사건, 교착관계에 있던 뮤지션들에게 조차 매몰찰 정도로 독재적이며 극단적인 성격이 비단 그를 인간적으로까지 존경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성향이 무대로 옮겨지면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렬함을 남기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을 보면 딱히 뭐라 탓할 수만은 없다. 살아생전 어떤 식으로 살았던지 간에 이는 그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모습일 뿐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음악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만큼 제임스 브라운이 남긴 음악은 20세기 최고의 위대한 유산인 것이다.



기사작성 / RHYTHMER.NET 오이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오이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코멘트

  • 등록
  • 황일만
    1. 황일만 (2011-01-04 19:41:37 / 119.194.13.***)

      추천 0 | 비추 0

    2. 잘 읽었습니다...

이전 목록 다음

관심 게시물

  1. 로딩중
GO TOP

사이트맵

리드머(RHYTHMER) | ⓒ 리드머 (Rhythmer). All rights reserved.

이메일 GO TOP